진료가 예정됐던 월요일(1월 4일)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병원 가기를 포기하고 대신 급하게 월요일 진료를 수요일(1월 6일)로 바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도 자르고 조카랑 저녁 약속이 있어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을 하며 버스에 타 병원으로 향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지만 며칠 전부터 변비가 있던터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담당 선생님이 초음파 사진을 보더니 "아~ 엄마 배가 아플 만했네요"라며 출산이 15% 진행되었다는 말씀을 전해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떨렸다.
"오늘은 내진 좀 해봅시다!"
내진, 말로만 듣던 내진이다. 하지만 워낙 겁을 먹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는 빨리, 그리고 쉽게 끝났다. 내진 후 담당 선생님은 아주 가볍게 "우리의 프로젝트는요, 오늘 저녁 가족들과 맛있는 거 드시고 오후 8시까지 병원와서 입원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떨리는 목소리로 "아, 네..."라며 겁먹은 눈빛을 보였고, 다시 담당 선생님은 "지금 주수에는 당연한 현상입니다"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눈물이 났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떨리는, 그리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나 오늘 당장 입원하래"라고 말했다. 왜 그 순간 눈물이 났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나는 진통할 땐 눈물 한방울,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출산을 눈앞에 둔 그 순간에는 너무 겁이 났다. 특히 예정일이 열흘 정도 남겨놓고 있던 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당초 나는 빨리 임신의 힘겨움에서 벗어나고자 예정일보다 일찍 아기를 출산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바인데, 그래서 열심히 운동했잖아. 할 수 있어! 다들 해내잖아.'
마음속으로 여러번 다짐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가는 길에 그동안 준비하지 못했던 몇가지 물건들을 구입하고, 집에 도착해서는 열심히 집 정리를 하고 미리 준비해뒀던 가방을 다시 쌌다.
그날 저녁엔 남편과 함께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불고기를 먹으며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병원행. 막상 병원에 가면 진통이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편이 "여보, 오늘 그냥 자고 내일 집에 바로 갈 거 같아"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무튼 출산을 앞둔 그날 밤 나는 팔뚝에 굵은 바늘을 꽂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신경을 많이 써던 탓일까, 너무 피곤해 잠도 잘 왔다.
다음날 아침, 배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간호사에게 태동기의 변화를 물으니 어제와 같다고 대답한다. '이런... 그럼 집에서 잘 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오전 7시가 되자 배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름 진통 시간의 간격을 쟀다. 5분 간격이 되자 머리에 식은땀이 났다. 예전에 간호사가 5분 간격이 되면 병원에 오라길래 그쯤되면 '순풍' 아기를 낳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진을 한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직 20% 진행이에요'라며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무통주사가 아니었다면...
3시간이 흐르고 4시간이 흘러도 쉽게 진행이 되질 않는다. 그동안 아픔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일전에 30~40% 진행되었을 때 무통주사를 맞을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나 언제쯤 주사를 맞을 수 있을지, 그 생각만 들었다.
배는 아파죽겠는데 같은 병실 다른 임산부 가족이 와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30%쯤 진행되었을때는 정말 나도 모르게 침대 손잡이를 붙잡고 진통을 참게 되었다. 손잡이를 비틀며 병원에서 배웠던 라마즈 호흡법도 해보지만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해 입은 타 들어갔고, 배는 여전히 너무 아팠다.
남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난번에 미리 출산 선물로 사준 옷 이야기를 하며 나를 격려하려 했지만, 내가 여전히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그걸로는 안되겠다'며 가방도 사준단다. 진통하느라 힘들지만 '이 말은 꼭 기억하리라'라고 맘속으로 외치며, 손잡이를 또 한번 움켜쥐었다.
이 고통이 언제나 끝나려나 마음 속으로 횟수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거의 스무번 이상되었을 때는 그 횟수도 잊고 말았다. 담당 선생님이 오더니 나더러 "잘 참고 있다"라며 다리를 두들겨줬다. 하지만 난 '너무 아프다'고, '무통주사를 언제 맞느냐'고 따졌고, 선생님은 "산모가 아프면 언제든지 놔드려야죠"라고 말했다. 무통주사 맞기만을 계속 기다렸는데, 너무 허무했다.
무통주사 동의서에 사인하고 등에 바늘을 꽂는데 마취과 담당의가 '이거 맞고 나중에 허리아프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나는 지금 아파 죽겠는데. 드디어 무통주사의 효과가 나타나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내진을 해도 아무런 느낌이 나질 않았다. 무통이 아주 잘 받았단다. 정말 다른 세상에 있는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몸이 약간 떨리긴 했지만 이것도 무통주사 때문이라 했다.
드디어 출산이 급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90%가 진행되었을 때 힘주는 연습을 하고, '잘한다'는 칭찬도 들으며 분만실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의사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자기 자리를 잡더니 담당 선생님이 내 다리 밑에 자리잡고 '하나 둘 셋'하면 힘을 주라고 한다.
그리고 한번, 두번, 세번, 힘을 주니 마침내 우리 아들이 '쑥'하고 나왔다. 너무 빨리 나와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올 때는 이미 아기가 거의 나와 있었다.
"오후 7시 6분 아들 낳으셨습니다"라는 말소리와 함께 온몸의 힘이 쭈욱 빠졌다. 12시간의 진통끝에 내가 드디어 해냈구나!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내 모든 기가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아들~ 건강하게 나와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이제 잘 지내보자'라고 말했다.
아들과 함께 보낸 지난 1년, 힘들지만 경이롭던 시간들
그렇게 나는 36살에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처음엔 정말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눕혀놓기만 하면 울어대는 아들 덕분에 낮잠 한번 제대로 못 잤다. 밤에도 한 번 깨면 두 세시간 혹은 네시간까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보채는 아이. 그때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처음엔 기저귀 가는 것도 서툴고 아기를 안는 것도 서툴어 내게만 오면 울어대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엄마가 서툴러서 미안, 초보엄마라 우리 건하 편하게도 못해주고 미안해 정말...'이라며 마음 속으로 아이에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어느새 지나가, 봄을 보내고, 여름을 보내고, 또 가을 보내고, 건하를 낳았던 겨울을 다시 맞았다. 그 사이 건하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만 11개월, 곧 있으면 돌이 된다.
지나간 시간을 결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건하를 낳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아기로 인해 새로운 기쁨을 맛보는 경험은 정말 경이롭기까지 했다.
건하가 우리에게로 온 2010년이 저물어간다. 건하로 인해 너무나 행복했던 2010년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테지만, 앞으로의 날들도 건하로 인해 항상 새롭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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