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노조가 내게 보낸 '초등학생 수준의 편지'

[정연주의 증언 53] KBS 안에 두 노조, 이렇게 달랐다

등록 2011.03.22 16:39수정 2011.03.2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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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엄경철) 파업 보름째인 2010년 7월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열린 '전국 조합원 총회'에서 새 노조 조합원들이 공정방송 사수와 임단협 체결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지금까지 두 가지 질문을 많이 받아 왔다. 첫째 질문은 "KBS가 왜 저렇게 되어 버렸느냐, 사장 하나 바뀌었다고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하나는 "KBS 노조가 왜 저 모양인가" 하는 것이다. 한때는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그렇게 난리 법석과 패악질을 부리고, KBS를 지키겠다며 그 앞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까지 시비를 걸던 그 노조가 요새는 무슨 바람이 불어 김인규 체제에 맞서 선명 투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나를 몰아내기 위해 별짓을 다하던 노조는 수구적이라 비판받아 온 KBS '옛 노조'(KBS 노동조합)이고, 요새 김인규 체제를 비판하는 노조는 젊은 기자·피디 중심으로 2010년 결성된 KBS '새 노조'(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라는 점을 잘 모른다.

KBS 문제를 꼼꼼하게 추적해 오지 않으면, '새 노조'와 '옛 노조'의 차이도 잘 모르고, 거기에 오로지 정연주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1직급 간부 60여 명(지금은 상당수 퇴직)이 만들었던, 그래서 지금은 존재도 없어진 '공정방송노조'라는 또 하나의 노조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그리고 최근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던 'KBS 오늘'의 문제의 근원에 다가서려면, 2008년으로 되돌아가서 당시 정치 상황과 연관지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특히 나의 강제 해임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당, 수구언론, KBS 노동조합(옛 노조) 등 3각 연대의 대공세,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진행된 검찰, 감사원, 국세청, 교육부,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 여러 권력 기관들의 해임 작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증언'의 전반부에서 나는 감사원의 행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증언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밖의 기관, 특히 검찰과 KBS 이사회, 그리고 KBS 노조의 행태와 이를 둘러싼 KBS 안팎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증언은 뒤로 미뤄놓았다.

'살아 움직이는 역사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

과거를 자세하게 복기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지금 기억하고 제대로 된 해석을 해야, 박제된 과거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되는 법이다.


최근 일본 대지진 뉴스 홍수로 인해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조와 위기를 보여준 사건들이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 가버리 듯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집단적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구제역 침출수 문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특보 출신이 총영사로 가 있었던 상해 총영사관 영사들과 중국인 여인의 이른바 '색계' 파동, 국가정보원의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BBK 사건의 에리카 김의 급작스러운 귀국과 검찰 수사, 한-EU FTA  및 한미 FTA 협정문 엉터리 번역 문제, MBC 피디수첩 손보기, 무릎 꿇고 통성기도 하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의 모습, 그리고 개신교 근본주의의 편협함과 오만, 한기총 총회장 선거와 거액의 선거자금 문제… 이 모든  뉴스들이 일본 대지진 뉴스의 홍수에 묻혀 망각 속으로 묻히려 하는 주요 쟁점들이다.


2008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나는 방송협회 회장 자격으로 그 취임식에 참석했다. 취임식이 끝난 뒤 대통령직을 마치고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떠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두 대통령이 그렇게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참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구나 하는, 그렇게 한가하고도 순진한 생각을 했다.

이 보다 앞서 2007년 12월 28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자는 만찬 회동을 가졌다. 이 날 만난 자리에서 이명박 당선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기가 다하셔도 선임자시니까, 제가 선임자 우대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선임자 우대'는 혹독한 검찰 수사와 주변 파헤치기 등 처절한 정치 보복으로 나타났으며, 끝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처참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008년 KBS 옛 노조-한나라당-수구언론,  일제 포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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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3일 저녁 여의도 KBS앞에서 이명박 정권 공영방송 장악음모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들이 '퇴진 최시중, 사수 정연주'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 권우성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있기 전부터, KBS 노동조합(11대 집행부, 위원장 박승규-현 보도본부 사회부장)과 수구언론, 한나라당이 일제 포격을 나에게 가하기 시작했다. KBS 노동조합에서 사장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 수구언론은 이를 대서 특필했고, 다시 한나라당은 이를 받아서 비판하는 형태의 확대 재생산 과정을 밟았다.

2008년 2월 13일, KBS 노조는 노보의 첫 머리 기사에서 '정연주 사장님께'라는 편지 형식의 글을 실었다. 논리도 엉성하고 비약도 심한 내용이었는데, 핵심은 사퇴하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글의 끝부분에 나를 비난하기 위해 <조선일보> 사설까지 인용했다. 그 사설은 '증언 10'(조폭언론 잔혹함,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에 나오는 증오와 왜곡이 가득한 격문 성격의 그 사설이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보라는 내용의 노보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소모적인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KBS가 무너지는 상황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무능을 고백하십시오. 미련과 아집을 버리십시오. 그동안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십시오. 우리의 인내는 지난 5년으로 충분했습니다. 정치적 구설을 피하기 위한 조합의 침묵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를 지키겠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내고 일부 친위 세력을 동원해 민주 대 반민주의 낯익은 정치판을 만들어내려는 어설픈 시도 또한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선가 정치권에 발 들여 놓은 자는 공영방송 사장의 자격이 없다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따로 떼 놓고 보면 옳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사장님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맞붙었던 이회창 후보를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여기서 굳이 사장님의 글을 다시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사장님의 글은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기자의 양심을 갖고 쓴 글이라고 주장하시겠지만 사장님이 KBS로 입성하는 순간 양심적 글쓰기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를 갖게 됐습니다.

KBS는 또 다시 낙하산 사장을 맞이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을 반면교사로 그 서글픈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난 기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수준의 편지' 1주일 뒤 공식으로 퇴진 요구


'무능을 고백하고, 미련과 아집을 버리고, 떠나라. 그게 5년간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예의다', 그런 말이었다. 사장이 무능했다는데, 어떻게 KBS가 영향력 1위, 신뢰도 1위가 되었을까. 그리고 KBS 사장으로 오기 전, <한겨레> 논설주간 시절에 쓴 글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양심적 글쓰기'도 KBS 사장으로 오는 순간 '정치 행위'가 되어 버린다는, 희한한 주장을 했다. 그렇다면 KBS 사장은 '양심적 글쓰기'를 포함하여 일체의 사회 참여, 정치 발언을 하지 않는 무색무취의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당시 이 글을 어느 지인에게 보여줬더니 "초등학교 학생 수준의 논리와 글쓰기"라며 피식 웃었다.

KBS 사장으로 오기 이전의 나의 글쓰기까지 정치적이라고 몰아세웠던 그 노조의 핵심 간부들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방송전략실장을 지낸 '특보 출신' 김인규 사장이 입성할 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리고 지금 김인규 사장 체제에서 어떤 자리를 누리고 있는지, 스스로의 이중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글에서 노조는 "정치적 구설을 피하기 위한 조합의 침묵"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실린 노보가 나가고 바로 1주일 뒤 노조는 '침묵'이 아닌 '확성기'를 들이댔다. 비상대책위 이름으로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해서 발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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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노조가 2008년 2월 20일 발행한 특보 ⓒ PD저널

비상대책위 결의문을 담은 '노보 특보'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닷새 앞둔 시점에 나온, 정치적 계산과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노조의 정치적 의도와 성향은 회사 내 개혁 성향 구성원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비대위 결의문을 담은 노보 특보의 첫 문장이 이랬다.
제 233차 KBS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가 어제 열렸다. 조합이 노보를 통해 사실상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실은 이후 처음 열린 회의였다.

1주일 전 편지의 성격을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편지'라고 규정지은 뒤, 그 글이 나간 다음 처음 열리는 회의라고 밝혔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정해 놓고 그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의도를 잘 드러냈다. 그러면서 "일부 비대위원들이 조합 집행부가 '이제는 행동을 보일 때!'라며 강경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장 퇴진 운동을 하겠다는 선전포고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비대위 결의문에는 그러한 의도에 충실하게 "이제 KBS의 미래를 위해 정 사장은 사퇴하는 것이 옳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조합도 더 이상 무능한 경영진에 우리의 미래를 내맡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 우리 구성원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본격적으로 퇴진 운동을 벌이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내용이 담긴 결의를 채택한 날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닷새 전,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였다. 그러한 때 수구언론과 한나라당이 기다리던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셈이었다.
#정연주 #KBS #KBS 새 노조 #KBS 옛 노조 #공방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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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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