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년행진', 이런 행사를 아이들이 봐야죠"

[인터뷰] 한국판 슬럿워크, '잡년행진'을 준비하는 그녀들

등록 2011.07.15 14:16수정 2011.08.3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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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느 봄, 갓 중학생이 된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만원버스에 올라탔다. 처음의 기억은 얼마나 선명한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나는 그때 내 허리에 닿은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실수겠지. 어렵사리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 할수록 허리를 감는 손길은 집요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손이 어디로 향할지 무서워 '이러지 말라'고 했지만, 열 네 살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갔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학교생활에 바빠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려오던 방학이 되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방학생활 수칙이 담긴 유인물을 뒤적이다, 문득 이 문장이 보였다.

"노출이 심한 옷차림은 성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단정한 옷차림으로 외출하도록 합니다."

이상했다. 이윽고 '단정한' 교복 위를 지나다니던 손길이 번뜩 생각났다. 그 섬뜩함은 몇 번의 여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여름이 올 때마다 그것이 내 잘못이었을까를 막연히 고민하던 찰나, '슬럿워크(Slut Walk : 야한 옷차림을 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를 만나게 되었다.

14일 저녁, 비 내리는 거리를 지나 서울 명동의 카페 '마리'를 찾았다. 냉방이 잘 되지 않는 마리는 꽤 더웠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희한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16일 진행되는 슬럿워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들 행사 때 사람들에게 나눠줄 리플릿을 접고 피켓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아로미깡'님이다. '슬럿워크코리아(트위터 @SlutWalkKorea, 블로그 http://slutwalkkorea.blogspot.com)의 계정 관리자 중 한 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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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행진 참가자들이 시민들에게 나눠줄 리플릿을 접고 있다. ⓒ 박가영


'잡년'이 어때서? 더 '센' 말 쓰라는 사람이 있는데


- 행사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캐나다를 비롯 해외에서 슬럿워크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고려대학교 의대생 집단 성추행 문제와 한양대학교 '성의 이해' 수업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던 때였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화가 났고, 불합리하다고 느꼈으며 또한 슬펐다.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의 피해자는 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의 원인이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때 이 행사를 꾸려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함께 트위터 계정을 개설·관리하고 행사를 진행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행사를 기획하고 만들어나가며 어떤 것을 느꼈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아무래도 트위터나 웹상에서 문자로만 소통하던 사람들을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일이다. 직접 그들을 만나고 직접 소통하는 일이 인상 깊다."

- 슬럿워크의 한국 명칭이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잡년행진'이라는 단어에 대해 보통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비속어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비하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과 '더 센 단어를 썼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하지만 '잡'이라는 단어에는 '여럿이'라는 뜻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실 '잡년행진'에는 공식 입장이랄 것도 없다. 개개인이 각자 여기에 참여하게 된 이유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한정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고 싶다',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 등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제각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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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마리'의 벽에 붙어있는 잡년행진 웹자보 ⓒ 박가영


"벗어라, 던져라, 잡년이 걷는다!"

- 이번 행사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지금 당장은 당일 행사를 잘 치르는 일이 먼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메시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사가 '재밌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이런 행사를 한다고 너희가 얻을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재밌으니까'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달되면서 모두 즐겁게 노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 듣고 보니 어쩐지 축제와 느낌이 비슷하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나?
"옷 바꿔 입기, 페이스페인팅,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다. 특히 '옷 바꿔 입기' 같은 경우는 평소 자기가 입고 싶었지만 자기와 어울리지 않아서, 혹은 뚱뚱해서 등의 이유로 포기했던 이들이 남들과 옷을 바꿔 입어보는 것이다. 광화문 행사 이후에는 홍익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홍대 앞 난장에서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플래시몹도 있다."

- 누가 나왔으면 좋겠나?
"모두 다. 복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나와 자기의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재밌게 잘 노는 자리니 부담 없이 참여하셨으면 좋겠다. 남자분들의 참여도 환영한다. 트위터 계정으로 매일 질문이나 공격이 들어온다. 그중에서는 '남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모는 것이냐' 등의 멘션이 잦은데, 그것은 논지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16일 '잡년행진' 일정
* 2시 ~ 3시 :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고대)
고대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잡년들의 당당한 워킹
* 3시 30분 ~ 4시 : 원표공원
신나는 음악과 함께 길바닥에서 막춤을! 헤나&에어스프레이/ 피켓 만들기/ 옷 바꿔입기/ 브래지어 수거함. ABBA의 Dancing Queen 플래시몹으로 행사 시작
* 4시 ~ 4시 30분 : 원표공원
[오프닝 공연] 레드걸, 지현 '행진' 선언문 낭독 후 잡년들 행진 시작(원표공원-덕수궁-원표공원)
* 5시 : 원표공원
행진 마무리, 시청역 이동 후 지하철로 홍대 이동
* 6시 ~ 6시 30분 : 홍대
홍대 8번 출구에서 뒤풀이 장소로 뻔뻔 당당하게 워킹
* 6시 30분 ~ 9시 : 홍대, 걷고 싶은 거리
[뒤풀이 공연] Feminist Singer 지현, Dafne Lee, 며칠 후면 내 생일, Prof. D, DJ Havaqquq

그동안 여성 역시 '잠재적 성범죄의 피해자'로 살아가면서 학습된 고통이 심하다. 남성들과 함께 바꾸어나가야 할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지 성별 간의 대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오래된 문제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다. 대립이나 다툼이 아닌, 구조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공감했으면 좋겠다.

어머니들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행사인 것은 알겠지만 아이들이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하고 걱정하시는데, 오히려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런 행사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쉬쉬하다보면 결국 아이들 역시 왜곡된 성 가치관을 배우기 쉬울 것이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카페 마리를 나오는 길, 어느새 비가 멈추고 하나둘 사람들이 각

자의 이유를 가지고 마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16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예쁜 옷을 눈치 보지 않고 입고 싶어서, 혹은 성범죄의 원인은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해보인다. 결국 16일에 모이게 될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기 위해서' 라는 것을. 그리고 그 씩씩한 얼굴로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벗어라, 던져라, 잡년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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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럿워크 웹자보 ⓒ 슬럿워크코리아

덧붙이는 글 | * 박가영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박가영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잡년행진 #슬럿워크 #원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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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 1기로 활동했습니다. 사람과 영화가 좋습니다. 이상은 영화, 현실은 시트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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