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 운명 벗으려 오신 분들 환영합니다"

토익 고득점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의 자화상

등록 2011.11.29 18:12수정 2011.11.3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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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면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을 허다하게 받던, 2010년 3학년 2학기 겨울방학에 나는 그 흔한 토익점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점수라고는 1학년 때 학교에서 본 모의토익점수가 전부. 그래서 3000원을 더 내는 추가접수기간에 접수해 토익을 보러갔다.


한 달 후에 나온 점수는 소위 '취업 스펙'에 한참 떨어진 점수였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선배에게 물어봤다. 선배는 990점 만점에서 980점을 받고 모 은행사에 입사가 확정된 상태. 아직도 토익점수가 없냐는 말과 함께 선배는 토익책 한 권을 줬다. 그게 나의 토익생활의 시작이었다. 선배는 두 달 토익학원을 다녀서 만든 점수가 980점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후일 알았다. 1년짜리 어학프로그램을 이수했었던 선배의 첫 토익 점수가 940점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난 여름 방학에 드디어 학원에 등록했다. 학비며 하숙비에 이래저래 집에 내밀어야 했던 손이 부끄러워 학원비를 아르바이트 금액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당시 하고 있었던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는 시급 4400원이었다. 당시 최저임금이었던 4000원에 비하면, 최저임금시급에도 못 미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일쑤였던 친구들보다 높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토익학원비 21만 원을 대려면 한 달에 48시간을 일해야 했다. 그 달 생활비가 빠듯해 학원까지 하루 두 시간씩 걸어다녔던 기억이 있다.

토익학원 한 달 수강... 하지만 900점은 넘지 못했다

토익책들 ⓒ 이형섭


학원에 들어섰을 땐, TV에서만 보던 공무원 준비학원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폭이 40cm 정도 되는 좁은 책상이 빼곡하게 놓여 있고 그나마 다섯줄마다 하나씩 있는 통로로 간신히 다닐 수 있었다. 강의를 시작한 강사의 첫 마디는 이랬다.

"저소득층의 운명을 벗으려고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한편 당시 친구들의 주요 이야깃거리는 '토익학원 스터디'였다. 토익스터디가 효과가 있나 해서 유심히 들어봤던 이야기는 실은 연애담인 경우가 많았다. 함께 스터디하는 오빠가 어떻다느니 동생이 어떻다느니, 300명가량 들어가는 좁은 강의실에서 펼쳐지는 청춘연애사는 오히려 캠퍼스에서보다 활발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오히려 수업만 듣고 헤어지기 바쁘니, 토익학원에서 남녀학생들끼리 주고 받던 커피에 붙여진 쪽지 등이 그들을 설레게 하는 듯 보였다. 한 친구는 토익학원에서 만난 '학원오빠'와 스터디 덕분에 매일 저녁을 먹었지만, 스터디가 끝나자 만남도 함께 끝났다며 슬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학원에 다니고 8시험을 봤다. 그러나 '900점'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말하자면 900점에 한참 못 미친 700점대였다). 취업준비생에게 '900점'이란 특별한 의미다. 소위 말하는 취업스펙, 즉 '취업필요요건'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서류검토를 할 때 4.5만점에 4.0이 넘는 학점보다 더욱 중요하게 보는 것이 이 토익 900점이라는 얘기가 떠돌 정도로 토익의 점수는 중요했다. 일부에선 토익이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로 희망을 주는 듯 했지만 그것도 토익 900점을 능가할 만한 남들과 다른 또 다른 '스펙'을 가진 사람에 한한 이야기였다.

아직도 나는 토익을 '졸업'하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는 J씨 ⓒ 이형섭


그리고 다음 달 토익시험에서 800점이 조금 넘는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몇 번의 서류전형에서 낙방. 역시 해결책은 '900점'처럼 보였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는 화제가 토익점수였다. 내 토익점수는 토익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말하길 두 달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지만, 다시 한 학기가 끝나고 처음 토익학원을 다닌 지 반 년이 지나도록 점수는 제자리였다. 

취업 컨설턴트를 찾아갔더니 본격적인 상담을 위해 필요하다면 100만 원이 넘는 수수료를 요구했다. 사전상담격인 대화에서 컨설턴트를 해주던 사람이 토익 900점이 못 되는 내 어학성적란에 밑줄을 좍좍 그었더랬다.

다시 토익학원에 등록했다. "저소득층의 운명"을 말하는 강사나, 강의실에 빽빽이 들어찬 300여 명의 학생들은 여전했다. 토익학원에서의 한 달, 그리고 다시 토익시험을 치는 데까지 총 100만 원은 들어간 것 같았다. 3000원의 추가접수비용을 제외한 두 번의 토익수강료 42만 원,
12번의 토익시험 46만8000원, 한 권당 최소한 1만5000원은 넘어가는 토익 책 수 권. 그러나 아직도 나는 토익을 '졸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년도 말까지 1회에 3만9000원이었던 토익응시료가 4만2000원으로 오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사회에서 철저히 '을'의 입장인 취업준비생들은 불만을 가지면서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금액이다. 토익시험주관사에서는 토익시험응시료 인상이유에 대해 어떤 설명도 없다. 다만 2012년 1월부터 응시료가 오른다는 일방적인 통보만 있을 뿐이다.

높은 토익점수가 필요한 청춘들은 원가공개요구도, 응시반대운동도 할 수 없다. 한 달이라도 빨리 900점을 얻어 취업해야 하는 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청춘들은 좁은 토익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토익책에 머리를 박고 공부하고 있다. 토익스터디에서 스치는 연애의 훈훈함에 잠시나마 몸을 녹이면서 말이다.
#토익응시료 인상 #토익 #면접 #취업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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