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 정수장학회 사무실 입구
조재현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 : "박근혜 후보가 권력형 비리근절을 말하는데 평생 권력형 비리, 장물로 월급 받고 지위를 유지하면서 살아오신 분이 말씀하시니까 잘 믿기지 않는다. 정수장학회도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태씨를 협박해 뜯어낸 장물 아닙니까?"'장물'이란 '부당하게 취득한 타인 소유의 재물'을 뜻한다. 지난 4일 열린 첫 번째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도 이 장물이 이슈로 떠올랐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두고 "장물로 월급받고 살아오신 분"(
동영상 5분)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 후보가 거론한 "장물"이란 박 후보가 10년간 이사장을 맡았던 정수장학회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와 삼화고무 등을 운영하던 사업가 김지태씨가 지난 1958년 설립한 '부일장학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김씨는 5·16 쿠데타 이후 <부산일보>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 서울문화방송 주식 100%, 토지 33만여 ㎡(10만 평)를 박정희 정권에게 헌납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토대로 지난 1962년 '5·16장학회'를 만들었고, 20년 후인 지난 1982년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문제는 정수장학회의 토대가 된 '재산 헌납'의 성격이다. 재산을 헌납하기 전 김지태씨와 그의 부인은 부정축재와 해외재산 도피, 밀수 등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혐의들이 충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김씨 등을 압박해 재산을 강제로 헌납받았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에서도 재산 헌납을 "공권력에 의해 강요된 행위"(
부일장학회부일장학회 재산 등 강제헌납의혹 사건 진실규명 결정 요지)라고 결론내렸고, 김씨의 유족들이 관련소송에서 시효문제로 패소하기는 했지만 부산고등법원조차 "강압에 의해 재산이 넘어갔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다(
한국경제). 정수장학회가 '강탈된 장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박 후보는 "김지태씨가 부패혐의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며 '장물 주장'을 반박했다(
한겨레).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지난 95년부터 2005년 2월까지 약 10년 동안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 후보는 상근직으로 근무한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억대의 연봉을 받았다. 2000년과 2001년에는 연 2억3520만 원,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연 1억3000만~1억4000만 안팎의 연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겨레). "장물로 월급받고 살아오신 분"이라는 이정희 후보의 지적이 전혀 빈말은 아니었다.
'장물'은 더 있다. 지난 1967년 설립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1947년 설립)와 청구대(1950년 설립)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탈됐다. 이러한 '대학 강탈'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깊숙이 개입했다.
청구대의 경우 지난 67년 대학 확장공사 도중 일어난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학이 박정희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주도해 "청구대는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고문으로 뫼시고 학교의 운영이나 이사의 진퇴에 대해 그 지도를 받아 지시에 따른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면서다. 대구대도 설립자 최준 선생이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넘겼지만 이후락 비서실장이 대구대를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해 박정희 정권에 강제로 헌납됐다. 이렇게 강탈된 두 대학을 합쳐 설립된 영남대의 정관 제1조에는 '교주 박정희'라고 새겨졌다.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지난 1980년 4월 박 대통령이나 박 후보가 영남대 설립에 출연한 자금이 전혀 없는데도 '영남대 교주'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로 박 후보를 영남대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학내 반발로 인해 같은 해 11월 평이사로 물러났다. 이후 박 후보는 평이사로 활동하다가 1988년 부정입학사태에 책임지고 평이사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박 후보가 영남대 이사를 맡으면서 받은 연봉 액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쟁점②] 박정희 때 제정된 영해법에는 서해5도가 빠져 있다
▲영해직선기선을 나타낸 지도.
국립해양조사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 "이정희 후보는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이 사실이라면 박수치고 싶다'고 얘기했다. NLL은 영토(해)선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목숨을 걸고 수호한 장병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생각한다."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 :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영해법이 제정됐다. 서해 5도 수역에는 초기 영해선이 없었다." 박근혜 후보는 "NLL이 영토선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목숨을 걸고 수호한 장병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공격(
동영상 15분)하자 이정희 후보가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영해법이 제정됐는데 (제정 당시) 서해 5도 수역에는 초기 영해선이 없었다"고 반격(
동영상 15분40초)에 나섰다.
영해법은 대한민국 영해의 범위와 관할을 규정하기 위해 지난 1977년 12월 31일 공포된 법률로, 1995년 '영해및접속수역법'으로 확대·개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영해는 기선(基線)으로부터 측정해 그 외측 12해리의 선으로 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동·남·서해의 최외곽에 위치하는 육지 또는 섬의 끝점으로 통상기점과 직선기점(동해안 4점·남해안 9점·서해안 10점)을 선포했다. 우리나라
영해기선은 이러한 영해기점을 연결해 동해안은 통상기선이, 서·남해안은 직선기선이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총 23곳의 기점 중 서해상의 영해 최북단 기점(기점 23)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 있는 소령도다. 세계측지계좌표 기준으로 이 섬의 위치는 북위 36도 58분 56초로 서해5도 중 최북단 섬인 백령도의 북위 37도 52분에 견줘 보면 한참 남쪽에 있다. 실제 국토해양부와 국립 해양조사원의 영해기선도에도 서해5도 지역은 NLL만 표시돼 있을 뿐 영해선과는 이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 당시 우리나라의 영해를 정하면서 왜 서해5도 지역을 빼놓았을까.
그 이유는 영해법이 제정하던 당시의 신문 보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977년 9월 24일자 <
경향신문>은 "정부는 독도 및 서해5도와 기타 우리 주권의 효력이 현실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북한 수역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의 규정을 준용, 명시적 획선을 피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또 1977년 8월 4일자 <동아일보>도 "기술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를 준용, 서해5도와 독도 등은 해도에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막을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외교안보전문지 <디펜스21> 김종대 편집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 "영해법을 제정할 당시 서해5도 해역을 영해에서 제외한 당사자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며 "이미 이 때 부터 NLL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지적했다. 김 편집장은 또 "당시에도 신민당 등 야당은 '서해5도 해역이 분쟁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했다"고 말했다.
[쟁점③] 전두환에게 받은 6억으로 '은마아파트 30채' 살 수 있다
▲1977년 육사에 재학중이던 박지만 생도를 박 대통령 가족이 면회하던 날 기념사진.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오른쪽),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두환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차지철 경호실장(박 대통령 오른쪽) 등이 눈길을 끈다
남산의 부장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 : "박근혜 후보는 평생 장물을 받고 살아온 분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6억 원을 줘서 받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당시 은마아파트 30채 살 수 있는 돈이다." 지난 1979년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은 당시 청와대 비서실을 압수수색해 찾은 두 개의 금고에 있던 현금 가운데 6억 원을 박근혜 후보에게 전달했다. 박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아버지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했다"며 "(전 합동수사본부장이) '아무 문제 없으니 배려하는 차원에서 해주겠다' 할 때, 경황없는 상황에서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정희 후보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게서 받은 6억 원이면 (이때 시세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었다"고 주장(
동영상 5분 20초)했다. 이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쪽에서 제기했던 주장이다.
▲1979년 9월 5일 <동아일보>에 실린 은마아파트 분양 광고
동아일보
1979년 9월 5일 <동아일보>에 실린 은마타운(옛 이름) 광고에 쓰인 평당가는 68만 원이었고, 크기는 31평형(102.479m²)과 34평형(112.397m²) 두 가지였다. 이 가격대로 계산하면 31평형 아파트 1채 값은 2108만 원, 34평형은 2312만 원이었다. 1979년에 6억 원을 가지고 있었다면 실제로 31평형짜리 은마아파트를 약 29채 살 수 있었다.
또한 박근혜 후보가 받은 6억 원의 현재 가치는 얼마일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화폐가치계산'에서 따져보니 1979년 6억 원은 2011년 33억9000만 원에 달했다. 5일 오후 부동산전문사이트
'부동산114'에서 찾은 가장 저렴한 은마아파트 31평형 매물의 가격은 6억 8401만 원. 초기 분양가보다 32배나 뛴 셈이다.
만약 박 후보가 당시 받은 6억 원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가 2012년 12월 공인중개업소 문을 두드렸다면, 은마아파트 31평형을 최대 5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1979년 6억 원을 모두 아파트에 투자했다면, 예상 수익은 192억3629만 원으로 훨씬 커진다. 박 후보가 대선후보로 등록하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은 21억8104만 원이다(
뉴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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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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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두환 6억', 정말 은마아파트 30채 값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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