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
이하영
자동차에 관한 숱한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첫 경험이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꼭 겨울 같은 초봄이었다. 내가 왜 이 밤에 차를 끌고 나왔을까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니 앞으로 가야지, 왜 뒤로 와서 가만히 있는 차를 들이 받고 그래요. 면허증 있어요?""있어요."신호를 받고 '급경사'라고 하는 곳에 정차해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을 못하고 있자 뒤에 있던 경찰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순간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저하다가 난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밟아도 소리만 요란 할 뿐 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긴장을 한 나머지 클러치에서 발을 떼지 못한 것이다.
면허증을 확인한 경찰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면허 딴 지 이제 석 달 밖에 안 됐네요, 연수도 안 받고 나왔지요?" 하고 물었다.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찰관은 그냥 봐줄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짐짓 내 눈을 피하며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본인 차입니까?"라고 물었다. 난 올 것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저 사실 제 차는 아니고요, 매형 찬데…. 매형은 제가 차를 끌고 나온 줄 모르거든요. 운전이 너무 하고 싶어서…."이렇게 말하고 난 다시 한 번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차주인인 매형한테 연락하지 말고 그냥 봐 달라는 간절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결국 그 경찰은 봐 주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었다. 사고 처리도 안 하고 차 주인인 매형한테 연락은 안 할 테니, 자동차 범퍼 값이나 달라고 했다.
두말없이 줬다. 알바해서 모은 돈을 톡톡 털어서 주었다. 취업 준비생에게 15만 원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큰 돈이었다.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왠지 사기 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더 언짢았다. 사실 경찰차 범퍼는 수리할 정도로 부서지지 않았었다. 칠이 약간 벗겨졌을 뿐이다. 그 경찰이 정말로 범퍼를 갈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1994년 3월 어느 날 밤, 면허를 따고 처음으로 도로에 나와서 겪은 일이다.
아내는 연신 이마를 비비고, 본네트에선 김이 모락모락첫 경험과 함께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더 있다. 199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 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오싹해진다.
'뻑'….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긴장감도 없었다. 긴장감 보다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그 긴장이 풀리고 난 후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본 네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자동차 사고 장면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아내는 연신 이마를 손으로 비비고 있고, 뒷자리에 있는 친구 부부도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나 혼자만 멀쩡한 것 같아 무척 미안했다. 억지로라도 아픈 표정을 지어볼까 하다가, 그 마저도 경황이 없어 그만 두었다.
"괜찮아?""응 괜찮아."모두 괜찮단다. 휴~다행이다. 억지로라도 괜찮다고 대답 하는 걸 보니 크게 아파 보이진 않았다. 이마를 문지르는 모양이나 고통스런 표정을 보면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은데, 아마도 애써 괜찮다고 대답 했을 것이다. 앞 차를 들이 받기 직전 속도가 100km 였으니 분명 괜찮을 리가 없다.
앞차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내렸다. 다행히 수더분한 인상이었고,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다. 이제 내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 먼저 다친 데는 없냐고 묻는 게 좋겠어',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이 요동쳤다.
"다친 데는 없어요?"이런! 내가 먼저 물어야 할 말인데 그가 먼저 묻고 말았다.
"네 괜찮습니다. 다치신 데는?""괜찮아요."이런 고마울 데가,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난 게 분명했다. 어떻게 책임 질 거냐고 악을 쓰지도 않았고 왜 가만히 서 있는 차를 들이 받느냐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욕을 하거나 악을 썼어도 난 찍소리 못하고 고스란히 당해야 할 처지였다.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는 사고였다. 무조건 내 잘 못이었다.
"빠~앙", 크고 긴 경적 소리가 깨운 내 망상천안에서 온양으로 가는 편도 2차선 국도였다. 난 1차선에서 달리고 있었고 대형 덤프트럭이 내 차 바로 옆 2차선에서 달리고 있었다. 먼발치로 흰색 승용차가 좌회전을 하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속도를 줄여야 할 상황이었다. 속도를 줄여 덤프트럭을 앞세운 다음 2차선으로 진입, 신호대기중인 차를 피해서 달려야 했었다. 그러나 난 속도를 줄이는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부서져라 밟았다. 액션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덤프트럭을 앞질러서 2차선으로 진입, 신호대기중인 흰색 승용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고고씽' 하려 한 것이다.
약 300m정도를 그렇게 카레이서처럼 달렸다. 계획대로 대형 덤프트럭을 약간 앞질렀다. 신호대기중인 흰색 승용차가 50m 전방에 보였다. 이제 액션배우처럼 흰색승용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뿅' 하고 달아나야 할 차례다.
"빠~앙", 크고 긴 경적 소리가 내 망상을 깨웠다. 덤프트럭 기사가 보낸 다급한 신호였다. 난 순간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뻑" 소리와 "아~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뻑" 소리는 내 차가 신호 대기 중이던 흰색 승용차를 들이 받으면서 난 소리고 '아~악" 소리는 일행들이 낸 소리였다.
채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난 수없이 많은 갈등을 하다가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그 1초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오른쪽으로 꺾었다면 분명 9시 뉴스에 나올 만한 대형 사고가 났을 것이다. 아나운서는 아마 이런 멘트를 하지 않았을까.
"덤프트럭이 승용차를 들이 받아 승용차에 타고 있던 신혼부부 두 쌍이 크게 다쳐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고를 낸 덤프트럭 기사는 '승용차가 갑자기 차선을 바꿔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