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고리원전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2012년 4월 27일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대형 '배너'를 제작해 펼쳐 보이는 활동을 벌였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안전이라는 것은 객관적이 될 수 없다. 안전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원전의 안전성에 관해서는 소위 '베크(Beck)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베크의 법칙이란 1965년 미국의 베크 박사가 1964년까지 과거 21년간 미국 원전 246기의 원자로 및 원전 사고기록을 분석해 발표한 논문의 결론이다.
"첫째, 원전 사고의 경우 상상 가능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둘째, 사고 시에는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사고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원인으로 일어나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상상 가능한 사고'란 원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를 말한다." 반원전학자인 오쿠노 고야(荻野晃也) 전 교토대 공학부 교수는 2011년 9월 도쿄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 "원전 추진파들이 철저히 베크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는데 원전 추진파의 생각이야말로 오히려 희망적 관측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고 "지난번 후쿠시마원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비록 안전대책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 예상치 못한 원인으로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면에서 국민의 원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불신을 극복하는 길은 고리 1호기를 이번 기회에 폐로하는 것이다. 국정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의 문제이다. 고리 1호기 폐쇄 결정이야말로 정부가 국민에게 내놓을 수 있는 원전의 안전관리에 대한 대정부 신뢰성의 최소한의 증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명박 전 정부의 원전르네상스정책을 재고해 시대를 역행하는 원전의 증설이나 수출대신 원전의 연구 홍보에 들어가는 엄청난 재원을 재생에너지 연구 개발로 전환하고 대국민 에너지절약캠페인을 적극 펼쳐야 할 때다.
원전폐로에 대한 좋은 사례로 독일의 북동부 루브민(Lubmin)지역의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원전을 들 수 있다. 2012년 5월 5일 일본 NHK BS1 다큐멘터리 웨이브(Wave) '탈원전에 요동치는 마을-독일 세계최대 원전적지(跡地)' 프로그램은 22년 전 폐지된 독일 그라이프스발트원전의 폐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고리원전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에 옛 소련제 원전에 대한 불안여론이 높자 이곳 원전 5기를 독일정부가 정치적으로 폐로를 결정한 것이다. 폐로 22년이 지난 지난해까지 해체 및 오염제거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동안 든 비용이 약 41억유로(약 6조원)이며, 앞으로 20~30년간 더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라이프스발트원전 지역은 폐원전의 터빈건물에 해양풍력발전기를 제조하는 덴마크기업을 비롯해 폐원전 부지안에 모두 30여개의 각종 대안에너지기업이 입주해 있는 재생가능에너지산업단지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 원전지역의 오염 제거 및 해체작업을 하며 사용후 폐연료봉을 용기에 보관하는 중간저장시설을 관리하는 EWN사는 민간기업이었던 것이 2000년 국유화됐다고 한다. 현재 이 회사와 관련돼 일하는 사람만 2000명으로 과거 원전 운전당시의 5000명에는 못 미치지만 20년 이상 계속 일을 해오고 있으며 그간 노하우가 쌓여 러시아를 비롯해 5개국 7개 원전의 해체작업을 수주하는 등 새로운 탈원전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언론에선 '루브민의 기적'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일 그라이프스발트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배울 점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리원전 1호기는 독일 그라이프스발트원전의 폐로 과정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거기에 아이디어를 하나 더 보태자면 고리 1호기를 지연해체하는 방식을 통해 '고리차세대에너지파크'로 리모델링해 근대산업유산을 살리면서도 전 국민의 '원전안전 및 대안에너지교육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고리원전이 있는 기장군 일대의 원전방재대책을 실질적으로 세워야 한다. 최근 탈원전선언을 한 스위스의 사례를 보면 종래 5기의 원전이 비교적 인구밀집지역 인근에 있었는데 '원자력과의 공존'을 인정하고 전 국토를 3개 구역으로 나눠 사태의 심각도에 대응한 긴급시 대책을 면밀히 수립해왔다. 가옥신축시 지하실이나 피난처 확보를 의무화했고, 공기청정기를 부착한 공동대피소도 곳곳에 마련돼 있으며 각 지구의 방사선량을 실시간으로 자택에서 체크할 수 있도록 돼 있다고 한다. 부산시 또한 시 원자력안전대책위원회를 좀 더 적극적으로 운영해 고리 1호기 폐쇄 및 고리핵단지 중단의 목소리를 중앙정부에 내고, 지난해 3월 고리 1호기 폐쇄를 촉구하는 대정부 결의안을 채택한 부산시의회도 좀 더 적극적인 후속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적으로 '원자로입지 심사지침'은 '혹 일어날 지도 모르는 최악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대도시 인근은 피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부산 고리지역은 이렇게 핵벨트화돼 가도 좋은 것일까.
이런 면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해 1월 '에너지 절약과 생산으로 원전1기 줄이기'와 '시민 참여형 신재생에너지 생산'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획기적이다. 서울시는 서울 시민들이 평소 사용하던 전력소비량을 13% 정도 줄이면 핵발전소 1기를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런 선언을 왜 정작 부산 울산 경남의 지자체 단체장은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지난해 2월에는 서울 노원구 김성환 구청장을 비롯해 여야를 망라한 전국 45개 지방자치단체장이 '탈핵 에너지 전환을 위한 도시선언 심포지엄'에 참석해 에너지 조례 제정, 에너지 협동조합 설립을 통한 신재생에너지 보급, 녹색 일자리 창출, 수명을 다한 원전 가동 중단과 증설 반대 등의 탈핵 선언문을 발표한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원전은 국책사업으로 안전대책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항이다. 이 때문인지 원전 운영에 그동안 지자체는 아무런 권한이 없고 오로지 사고수습에 대한 책임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원자력안전위를 비롯해 각종 원전행정에 지자체가 적극 참여하도록 관련 법을 바꿔야 한다. 이제부터는 원전을 '지방자치의 문제'로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자체 단체장과 시의원은 특히 '에너지 지방분권'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참사를 계기로 '과학기술을 주민의 손에'라고 하는 새로운 주민자치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위험한 원전을 재정이 약한 지역에 보조금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유치토록 하는 구조를 고쳐야 한다. 우리는 1986년 체르노빌원전참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제 후쿠시마원전 참사의 교훈마저 더 이상 남의 나라 일로 보아선 절대 안 된다. 후쿠시마원전 마을의 길로 갈 것인지, 그라이프스발트원전 마을의 길로 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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