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2007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민국 대통령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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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궁색한 처지는 <조선일보>에서도 읽힌다.
이 신문은 지난 6월 25일 '2007 남북정상회담에 대한민국 대통령은 있었나'라는 제목의 아주 긴 사설을 내보냈다. 이날은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국회 정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그 발췌본을 언론에 공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물론 이 신문은 회의록 전문을 손에 넣었다.
이들은 회의록을 샅샅이 뜯어본 뒤, '노, "괴물 NLL 바꿔야... 김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알다시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미리 짠 듯 같은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네 면에 걸쳐 두 정상이 나눈 대화의 몇몇 대목들을 골라 '대화록 전문 주요 내용'이라며 소개했다. 곳곳에 '노 "핵문제는 해결 방향 잡아... 김 위원장께서 지도력 발휘하신 결과"'라거나 '노 "주적 용어 없앴고... 미의 작전통제권 환수 중"' 따위의 발문들을 뽑아 두껍게 박아 넣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압권은 역시 사설이었다. 앞서 소개한 발언들 가운데 다시 고르고 고른 몇몇 문장들을 다시 옮기며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모독", "자국민을 이렇게 상스러운 표현으로 비하"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를 욕보인 처신" 등의 해설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독자들이 노 전 대통령 발언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몹시도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사설은 이렇게 맺고 있다.
"(이번 일이) 자기 이념적 편향(偏向)과 자신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 국익과 국민의 자존(自尊)을 멋대로 재단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규범이 돼야 한다...... 대통령에 의한 국기 문란 사태는 여야의 문제를 떠나 단 하나의 의문점도 없이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한다."노 전 대통령이 "자기 이념적 편향(偏向)과 자신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 국익과 국민의 자존을 멋대로 재단"했다며 멋대로 종북의 낙인을 찍은 것도 기가 막히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의 본질을 "대통령에 의한 국기 문란 사태"로 규정한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만다.
국정원이 저지른 가히 쿠데타에 가까운 국기 문란 행위는 온데간데없이 대통령에 의한 국기 문란이 사건의 본질이라니, 이 어처구니 없는 신문사의 '입장'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일보>가 서둘러 발을 뺀 이유그런데 며칠 뒤부터 이 신문의 논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이틀 뒤인 6월 27일에는 '북 "NLL, 노 대통령에 전화해 물어보라"'라는 헤드라인 아래 난데없이 북측의 주장을 실었다. 2007년 11월 열린 2차 남북국방장관 회담에서 당시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우리 측 김장수 국방장관에게 "NLL을 고집하는 것은 북남 수뇌회담의 정신과 결과를 모르고 하는 얘기"라면서 "노대통령에 전화해 물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회 정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언론에 공개한 이틀 뒤였다.
이 신문이 언제부터 북측의 주장, 그것도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지는 회담장에서의 발언들을 그처럼 신뢰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정작 그 회담의 우리 측 책임자였던 김장수 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이 그에 대해 어떠한 확인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막상 회의록 전문을 접한 국민의 대다수가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주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의 핵심 인사였던 김무성·권영세 두 사람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자 엉뚱한 곳에서 논거를 끌어와 여론의 물꼬를 되돌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인 6월 29일, 이 신문은 '여야가 대한민국을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다'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엉뚱한 곳으로 번지고 있다.""포기한 듯한 발언"이라니, 겨우 나흘 전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수준"까지 문제 삼으며 거품을 물고 몰아붙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논조다. 이어 사설은 며칠 사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둘러싸고 새누리당과 민주당 측이 새롭게 제기한 의혹들을 다루면서 "양측 모두 문제의 근원인 NLL 발언의 진상을 비켜가고 있다"고 질타했다. 무언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몹시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주말을 보낸 7월 1일자 신문에서 'NLL'이란 단어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6면에 가서야 '民生팽개친 'NLL 공방'… 與野 지지율 함께 하락'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사생결단식 정치 공방'으로 경제 민주화와 민생입법이 뒷전으로 밀리고 박근혜대통령의 국정수행지지율과 새누리·민주당의 지지율이 모두 하락했다는 내용이다. "청와대와 여야가 모두 패자가 되고 있는 국면"이라는 걱정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중요한 기사거리라 해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둘러싼 의혹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 며칠 새 이렇듯 빨리 관심이 사그라지는 건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서둘러 발을 빼야 할 다른 사정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가령, 아주 심하게 헛다리를 짚었다든가 하는.
우리 정치에 거는 마지막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