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스님과 원조 남친, 감추고 싶었습니다

[시민기자 취재뒷얘기④] 미담기사만 쓰자던 나의 철칙, 깨지고 난 지금...

등록 2013.10.27 12:00수정 2013.10.27 16:33
3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민기자 취재뒷얘기 시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고 느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시민기자 여러분의 자발적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되도록 미담 기사만 쓰자'는 것이 나만의 기사쓰기 철칙이었다. 고양이 목을 옥죄고 있는 줄을 풀어주기 위해 온가족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고물을 주워 번 돈으로 어렵게 손주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할머니 이야기. 그런 기사 밑에 달려오는 댓글들은 무척 부드러웠고 도착하는 쪽지나 메일 등도 무척 화기애애한 내용들이다.


그러니 괜히 사회 고발기사 같은 것을 써서 댓글로 욕먹고 기분 나쁜 쪽지를 받고 하느니 계속해서, '사는 이야기'섹션을 쓰면서 필화 후유증을 최소화 하는 게 현명한 기사쓰기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미담 기사만 쓰자던 나의 소심한 약속은 길게 지켜지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좀처럼 미담사례가 발생하지 않았고 대신 국정원 공작정치, 교학사 교과서 왜곡 사태 등 나를 흥분시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어느덧 나는 '사는 이야기' 섹션을 벗어나 분노가 담긴 기사들을 송고하고 있었다.

나의 기사쓰기 영역이 사회, 정치, 교육 등으로 확대되는 사이 맷집도 늘어 '야! 이, 정 기자☓아!'로 시작하는 살벌한 댓글이나 쪽지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경지까지 발전했다. 

과거 썼던  두 개의 기사, 마음의 빚이 남아 있다

마음의 빚이 무겁게 남아 있는 두 건의 기사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특수한 신분상의 위치  때문에 세상에 드러내기 싫어하는 주변 어른들을 기사에 등장시켰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내 기사에 가명 또는 영문 이니셜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스님, 왜 하필 저를 찍으셨나요?' 라는 제목의 기사는 나에게 집요하게 출가를 권유했던 B비구니 스님과 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은 글이다. 또 하나는 "내 처자식이 거기 있다네. 평양으로 날 보내주게"라는 제목의 기사로 장기수 선생님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시시콜콜 소개했다.

비구니 스님, 비전향 장기수. 모두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그래서 인터넷 매체에 접속할 가능성도 낮다. 내가 감히 그분들을 기사에 도용할 욕심을 낸 데는 인터넷 접속이 용이하지 않는 그분들의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B스님 기사가 나가고 나자 사찰 이름, 법명을 가명으로 기재했음에도, '그 스님, 아무래도 00사 B스님 같은데요?', '기사 내용을 보니 B스님 이야기구만요. 근데 아직도 상좌 못 구하셨대요?'라는 내용이 담긴 예리한 쪽지들이 날아와 찔끔했다.

장기수 선생님들 기사가 나가고 나서도 역시 '양심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교수인데 그 분들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는지요', '선생님들 보살펴 드리고 싶은데 만나 뵐 수 있을까요?'라는 내용의 쪽지가 오는 통에 그들의 성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선생님들이 아시면 큰일 날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무리 의도가 순수하고 결백하다 해도 다시는 주변 사람들 뜻에 위배되는 기사는 쓰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저에겐 이미 '라훌라'가 있습니다"

a

다큐멘터리 <법정 스님의 의자> 중 한 장면. ⓒ KBS미디어·포춘미디어


그런데 B스님을 작년 이맘때 하필 오연호 대표의 '새로운 100년 북 콘서트'  행사에서 딱 맞닥뜨리리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B스님에 대한 그리움, 죄스러움은 같은 것이 늘 가슴 한 곳에 남아 있었는데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길에서 스님 사찰 소유의 봉고차와 옆 차선에 나란히 신호 대기 중인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차 문을 내리고 봉고차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 죄송한데요. 거기 주지 스님 잘 계십니까? 어디 편찮으시거나 그러시진 않죠?"
"네. 그럼요. 근데, 스님한테 누구라고 안부 전해드릴까요?"
"아! 아니요. 그냥 아무도 아니에요. 스님한테는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황급히 창문을 올려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새로운 100년' 북 콘서트 현장에서 스님을 만나니 적잖이 당황했다. 내 걱정은 과연 스님께서 그때 그 기사를 읽으셨나 하는 것이었다. 읽었더라면 당신 이야기 인줄 단박 아셨을 텐데. 직접 여쭤 볼 수도 없고 그래서 살짝 우회적인 질문으로 스님을 살폈다.

"스님. 오늘 북 콘서트 텍스트, 새로운 100년은 읽으셨어요?"
"그러엄. 당연히 읽었지"
"그럼, 책에서, 법륜스님 은사스님이 고등학생이던 법륜스님에게 출가하라고 설득할 때 하셨다는 말씀도 기억하시겠네요?"
"응. 그런데··· 왜?"
"얼마나 멋있어요! '넌 장차 백 용성 스님 법맥을 잇게 될 재목이다' '너는 출가하여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갈 훌륭한 스님이 될 것이다.' 그런 근사한 말로 어린 법륜스님을 설득하셨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기왕이면 스님도 예전에 저한테 그렇게 화려하게 설득하지 그러셨어요? 훌륭한 명분, 비장한 사명감 그런 걸로 저를 부추기셨더라면 헤헤헤. 또 모르죠, 혹시 출가 했을지도요. 이렇게 결혼하는 '사태'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쵸? 호호호."
"그런가?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다. 허허허허. 내가 그때 좀 약했다. 허허"
"이제 때는 늦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라훌라'가 있거든요. 히히."
"오! 라훌라? 허허허."

'라훌라'는 부처님의 출가 전 아들 이름이다. 부처님의 출가 의지를 흔들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자 걸림돌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은 아들의 탄생을 일컬어 '라훌라여!'하고 탄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훌라'는 내 핸드폰에 저장된 딸의 닉네임이기도 하다.

바빠서, 먼저 가신다며 계단을 내려가시던 스님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계단을 올라 오셨다. 그리고는 나를 부르시더니 내 귓가에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셨다.

"잘됐다. 이번에는 아예 라훌라랑 같이 출가해버리면 되겠다. 어떠냐? 흐흐흐흐!"
"네에?"

스님이 너무 고소하다는 듯이 웃으시며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나는 그야말로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옛 사가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린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켜 버린 일이었다. 스님은 그런 부처님의 파격적인 조치를 빗대어 나를 겁주신 것이었다.

최근 접한 소식에 의하면 B스님은 끝내 마음 맞는 상좌가 없었던지 절 운영을 결국 비구스님에게 맡기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절은 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다양한 대민 프로그램들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B스님은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수행의 결과물인 물적·정신적 기반을 대사회봉사의 도량으로 회향하셨다.

나의 원조 남자친구, S 선생님

a

역사의 길 앞에서 그대 걷고 있는가 망월묘역 입구 수많은 만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정미경


나의 또 다른 기사의 주인공인 두 분 장기수 선생님의 근황은 어떤가. 82살의 P선생님은 쓰러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시고 S선생님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오랜 수감생활과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쓰러지신 P선생님은 회복이 더뎌 이젠 사람도 거의 못 알아보신다. 아마도 P선생님은 영영 못 일어나실 것 같다. P선생님과는 다큐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같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개봉 시기에 맞춰 선생님이 쓰러지셨고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P선생님은 과거 남파공작원을 실어 나르던 공작선의 선장이었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 선생님은 직업적 본능으로 진실을 간파하셨다. '천안함 피폭? 웃기지 말라 그래' 선장 출신의 노 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곤 하셨다. P선생이 가시고 나면 S선생님은 외롭게 혼자 남으실 것이다.      

S선생님은 내게 원조 남자친구였다. 30년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선생님이 자서전 집필을 모색 중인 과정에 우리는 만났다. S선생님을 통해 고인이 되신 Y선생님, P선생님 등 비슷한 처지의 주변 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S선생님을 매개로 얽히게 된 '넝쿨째 굴러온 종북'세력이었다. 처음 S선생님을 만났던 것처럼 다시 다른 선생님들은 세상을 떠나고 조만간 내 옆에는 다시 S선생님만 남게 되겠지만 S선생님도 앞날을 마냥 기약할 수 없다. 선생님은 올해 86살이시다.   

"야. 남들이 나 부럽단다. 너 같은 딸 있다고. 히히."

P선생님 문병을 다녀온 날 함께 우리 집으로 와서 거실 소파에 앉자 느닷없이 S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제가 선생님 딸이라고요?"
"사람들이 그러더라, 네가 내 딸이라고 흐흐. 아까 병실에서 P선생 제수씨도 그러지 않던?"
"선생님 딸 노릇은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황장엽이라면 모를까."
"야! 넌, 나만 보면 꼭 그 재수 없는 인간 이야기를 하더라."
"그 '재수 없는 인간'은 그래도 수완이 좋아서, 죽을 때 수양딸한테 재산도 많이 남겼답니다. 똑같이 북에서 내려 와서, 같은 대학 출신에, 당연히 비교가 되죠. 선생님의 새로운 동문 조명철이라는 사람은 또 어떻고요? 권은희 과장한테 '당신, 광주 경찰이냐, 대한민국 경찰이냐' 눈 부라리며, 남한사회에서 튀어보겠다고 '열심히' 하잖아요. 거기 비하면 선생님은...  엄청 무능하신 거예요."

남편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니까 선생님. 이 사람 말은요. 선생님도 이제 보호관찰 그런 거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시고 밖에도 다니시고 활동도 하시고 그러시라는 뜻입니다."

"김 서방. 난 말이지. 이 꼴 저 꼴 당최 보기가 싫어. 정치판 돌아가는 꼬락서니도 신물 나고 밖에 나와 돌아봐도 다 꼴불견이고."

선생님은 얼마 전 세상을 뜬 당신의 동생 장례식조차 불참하셨다. 무슨 낯으로 제수씨를 보겠냐며 가지 않으셨다. 형인 자신 때문에 과거 감옥생활은 물론 고문까지 당했던 아픈 사연을 품고 있었다. 동생의 발인식이 진행되고 있던 그 시간에 선생님은 나랑 두어 시간에 걸쳐 오래 전화통화를 하시면서 애써 태연한 척 엉뚱한 말만 늘어 놓으셨다.

내색을 안 해도 선생님의 힘없는 목소리에서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은 피붙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한 최고 대학을 나온 동생들이 연좌제라는 덫에 걸려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했고, 그 불행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남한에서 태어나 자란 선생님은 남쪽에 부모형제들의 묘가 있고 북에는 60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는 처자식이 있다.

"아무데도 쓸모없는 나 같은 노인 누가 반긴다고."
"그래도 해마다 5·18이면 선생님들하고 망월동 다녀오고 식사 같이 하고 그랬는데 올해는 그러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반갑지도 않은 대통령 좀 온다고 팔십 넘은 노인들 행차를 막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게 말이지. 괜히 움직여서 담당 형사 곤란하게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출입처 동화라는 것이 기자들 세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담당형사와 피감찰자 사이에도 출입처 동화 현상이 심각한 상태로 진행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외로운 독거노인에게, 담당형사의 정기적인 방문이 사회복지사의 보살핌처럼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그리고 요새 형사들의 감찰 행위는 굉장히 세련되고 인간적이다. 그래서 감찰자의 본래 방문 의도를 망각하고 피감찰자 스스로 형사에게 '협조'하게 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보호관찰 기간이 몇 십 년 장기화 되다 보니 빚어진 부작용이다.

언젠가 선생님은, 담당 형사가 진급했다고 자신 일처럼 기뻐하셨다.

"야! 내 담당, 이번에 경위로 승진했다. 기특하지? 허허"
"세상에! 보호관찰 대상자 처지에 담당형사 승진한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런 선생님이니 형사 '일하기 좋게' 대통령이 망월동에 왔던 올해 5.18에는 자진해서 댁에 얌전하게 계셨던 것이다. 순전히 담당 형사에게 협조차원에서 말이다.   
 
"저번에, 경위 승진했다고 자랑하시던 그 사람 아직도 담당이에요?"
"아니. 진즉 바뀌었지. 그런데 그 친구, 저번 경감시험에서 아깝게 미끄러졌단 말이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걸려 떨어졌어."
"그 형사라는 사람은, 피감찰자한테 와서 감찰 업무는 안하고 맨날 자기 승진문제나 의논하고 그래요? 선생님 같이 관운 없는 노인한테 승진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그 나이에 '경위' 달았으면 남들보단 엄청 빠른 거여!"
"보세요 .선생님은 이십년 된 나보다 수시로 바뀌는 형사들을 더 생각하신다니까. 그러면서 딸은 무슨."

86세의 선생님은 거동뿐 아니라 기억력도 급격히 쇠퇴해 자꾸 실랑이를 하게 된다. 예전에 몇 번 했던 말을 처음 하는 거라고 우기시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옛날에 분명히 했는데 내가 잊어먹었다고 나무라신다.

선생님의 구술은 거의 '이 말은 내가 너한테만 해주는 이야기인데.', ' 내가 저쪽에 있을 때' 또는 '내가 안에 있을 때'로 서두가 시작 된다. '저쪽'은 스스로 선택한 체제 북한을 뜻하고 '안에'는 30넘게 거주했던 교도소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모두 비밀유지를 전제로 한다. 나는 다시는 그분들을 필화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스스로의 약속을 점검중이다.
#기사 #비구니 #장기수 #조국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5. 5 "과제 개떡같이 내지 마라" "빵점"... 모욕당한 교사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