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보증금 1000만 원을 받지 못한 채 짐을 쌌다. 그리고 보증금을 되찾기 까지는 4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플리커
못 받은 1000만 원... 집 나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라니처음에는 한 달 안에 집이 나갈 수 있다고 위안 삼았다.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만 집이 나가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침 대학생들이 집을 구할 시즌이었다. 그러나 새 학기가 시작하도록 새로운 세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 아저씨는 내게 새로 구한 집을 포기하고 기다리든지, 아니면 먼저 이사를 갔다가 나중에 방이 나갔을 때 돈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먼저 이사를 가려면 보증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주변 사람들은 내가 젊은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는 거라며 무조건 세게 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호구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했다. 화를 내고 자꾸 압박해야 하나라도 일처리가 되는 게 현실이라고 조언했다. 그 1000만 원은 내게 전 재산이었다. 나는 불안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부동산 아저씨와는 승강이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계속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진짜 집주인 연락처를 달라고 닦달할 때마다 점점 길게 자기 사정을 늘어놓았다. 갈수록 길어지는 하소연을 듣다 보면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남의 사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제 할 말만 하는 것이 밉살스러웠다.
밤에 퇴근한 뒤에는 인터넷으로 임대차 계약에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검색했다. 세상에는 보증금 못 받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차고 넘치는 듯했다. 오죽하면 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이사 가는 이들을 위한 '임차권등기명령제도'까지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이 제도를 입에 올리자마자 부동산 아저씨는 얼굴을 붉히면서 펄펄 뛰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집 빠질 텐데 아가씨 정말 왜 이래요?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해요? 안 떼먹어, 문제없다니까. 하루 이틀 장사하고 말 것도 아니고 우리가 미쳤다고 일처리를 그렇게 하겠어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다. 계약이 만료되던 날, 결국 나는 보증금을 받지 못한 채로 이사했다.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 필요한 보증금은 친구들에게 조금씩 빌려서 만들었다.
빈 방에 삼단 플라스틱 서랍장과 바퀴 달린 철제 행어를 남겨두었다. 옷걸이에는 낡은 겨울 패딩 하나를 걸어뒀다. 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방을 빼는 경우에는 짐을 몇 개라도 남겨둬야 한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사 가는 날, 텅 빈 방에 남긴 이 물건들이 전부 잡히도록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까지 했다. 관리인 아주머니에게는 보증금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내용, 월세와 공과금을 추가로 물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한 문서에 대리인 서명을 해달라고 해 팩스로 받았다.
이사 하는 날 통화에서, 아주머니는 이제 전화기에 내 이름이 뜨는 것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 아줌마 진짜 웃기는 분이네.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저는 뭐 좋아서 이래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나는 이삿짐을 반쯤 실은 트럭 옆에 서서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때 중개인 아저씨가 나를 보고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게 아닌가.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방이 더러우니 나보고 청소해라? 그만 울고 말았다이사를 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받지 못한 보증금, 남겨둔 짐과 함께 내 몸의 일부가 옛집에 남아 있는 듯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못 받은 돈이 떠오르면 잠이 확 달아났다.
돈을 언제 받을지 모른다는 막막함과 집주인에 대한 분노 말고도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나를 괴롭혔다. 보증금을 못 받고 이사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바보 같다", "너무 착한 거 아니냐"며 혀를 찼다. 나는 꼭 내가 무능력해서 이런 일을 겪은 것만 같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나는 이사한 뒤로도 자주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왜 이렇게 집이 나가지 않느냐고 했더니, 중개인 아저씨는 "가스레인지 부근이 좀 지저분하다"고 대답했다.
"많이 그렇다는 건 아닌데... 들러서 청소 한 번 하면 어때요? 집 빨리 빠지길 바라잖아요? 뭐라도 해봐야죠. 딱 보기에 새 것처럼 보이면 아무래도 좋겠죠.""계약 기간도 끝났는데, 그런 건 집주인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아직 책임은 그쪽한테 있죠. 짐도 다 안 빼고 남겨놨잖아요."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왜 계약서에 명시된 권리는 지켜지지 않는 게 당연한데, 의무는 다해야 하는 걸까? 퇴근을 하고 옛집에 들렀다. 챙겨간 청소도구를 꺼내 세제를 풀고 가스레인지와 싱크대 주변을 솔로 박박 문질러 닦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2013년 6월, 이사한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드디어 집이 나갔다는 것이었다. 너무 손꼽아 기다려왔던 터라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중개인은 내가 알던 아저씨가 아니라 낯선 여성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세입자가 계약을 했고 월말에 입주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보증금을 못 받았다 그러셨나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이 내가 알던 중개인의 후임이라고, 이전 아저씨는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얼핏 듣긴 했는데, 사장님이 지금 퇴근하셔서 자세히 여쭤보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럼 다음 세입자 들어오는 날 부동산에 나오시면 되겠네요.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잔금 치를 테니까요."드디어 잔금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부동산에 도착했다. 중개인이 나를 맞으면서, 집주인도 금방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오늘 집주인도 오나요?" "그럼요. 당연히 와야죠. 왜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관리인이라는 아줌마하고만 통화했었거든요." "아, 그분, 저도 몇 번 통화한 적 있어요. 그분은 이제 관련 없어졌어요. 지금은 집주인 분이 직접 다 하세요."중간 관리인 아주머니가 일에서 손을 뗐다는 소식을 듣고 중개인에게 그간의 사정을 토로했다. 새 중개인은 "원래 집주인은 남자였는데 그 건물을 딸에게 주었다"며, 최근 본격적으로 관리를 맡겼다고 알려줬다. 그러니까 이전 관리인 아주머니가 얘기하던 '대학 동창'은 사실 집주인 아저씨였고, '사모님'은 그 집주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 관리인 아주머니, 제 생각엔 과잉충성이 아니었나 싶어요. 집주인 분은 아무것도 모르시던 걸요? 아마 아주머니가 중간에서 말을 옮기기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