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사람이 약자다. 내 보증금을 쥐고 흔드는 집주인은 아쉬울 게 없는 강자다. 정말 우리 돈 천만 원을 떼어갈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금이 저렸다. (* 사진은 실제 살던 원룸과 관계없음)
이수지
집주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부동산을 찾아가 보증보험에 대해 물었다. 보증금을 안 준다고 부동산에서 물어주는 건 없다고 했다. 그럼 이 보험은 뭔가. 뭘 보증을 해준다는 건가. 무료법률구조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당연히 돌려받는 게 맞는 보증금이기에, 소송을 하면 이길 확률은 높다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건 6개월 이상이 걸리는 장기적인 싸움이라, 웬만하면 원만히 해결하는 게 답이라고 조언했다. 6개월 이상이 걸릴 소송싸움 끝에 내가 얻는 건 비싼 소송비를 제외하고 남은 보증금이다. 소송에서 진 집주인이 물어내야 하는 건, 애초에 응당 돌려줘야 했던 보증금뿐이다.
내 돈을 쥐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집주인이지만, 소송을 걸어 더 고통스러울 사람은 나였다. 내가 소송을 걸더라도, 집주인은 끝까지 내 돈을 쥐고 나를 괴롭히다, 소송에서 지면 그때서야 내놓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나는 휘둘리고 있었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했다. 보증금은 엄연히 내 돈이었지만 민사소송을 하지 않는 이상 돌려받을 수 없었다.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리비로 제시한 금액을 제외하고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집주인은 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그렇게 일 주일. 남편과 나는 사색이 되었다.
강남에만 해도 집이 여러 채 있다는 집주인이 천만 원을 융통하기 어려워 돌려주지 않은 건 아닐 터였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고작 55만 원 하는 월세방에 살면서, 할 말은 다 하는 나를 혼쭐을 내 주고 싶었을 거다. 집주인이 이겼다. 집주인의 바람대로 나는 단단히 혼쭐이 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집주인의 마음이 바뀌어 보증금을 입금하지는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인터넷 뱅킹의 거래내역을 조회했다. 새로 고침을 아무리 해도 보증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새로 고침을 계속 눌렀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응, 여행 준비는 잘 되고 있고?"여행 준비. 지난 몇 주간 보증금 문제로 온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여행 준비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여행에 대한 설렘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니. 보증금 문제로 여행은 아예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빠가 내뱉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톡 건드렸다. 나는 내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집주인 책임인 수리비를 내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지난 몇 주간 겪은 심리적 고통이 물꼬를 트고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아빠…. 집주인이 내 보증금 천만 원 안 준대."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에 대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빠는 삼촌이 아는 변호사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며 나를 다독였다. 아빠의 그 말에 더 서러웠다. 나는 내 권리를 스스로 지켜낼 힘도 없다.
전화를 끊고, 코를 훌쩍이며 다시 인터넷 뱅킹을 확인했다. 거래내역 없음. 다시 확인했다. 어? 빨간 숫자. 9로 시작하는 백만 원대의 금액. 보증금이다. 집주인이 원했던 금액을 제외한, 딱 그만큼의 숫자다.
"나는 우리 딸이 똑똑하고 강한 줄만 알았더니. 보증금 때문에 울고불고 헛똑똑이네. 우리 딸이니까 오랫동안 멀리 여행가도 잘하겠다 싶었는데. 아빠가 믿어도 되는 거야?" 며칠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빠가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아빠의 말이 맞다. 내가 똑똑하지 못했다. 임대계약 전 법을 꼼꼼히 공부하지 않았던, 법에 대해 무지했던 내 잘못이다. 집을 계약하기 전 집의 옷장 구석에서부터 수도관 틈새까지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상식적 수준의 수리와 관리는 집주인 측에서 응당 제공할 거라 믿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세입자이고 집주인이기에, 임대계약을 다루는 법, 세입자를 보호하는 법이 탄탄하리라고 믿었다. 내가 틀렸다.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경우는 없다고 우기던 내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천만 원이 아니라, 수천만 원, 억대가 넘는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경우도 많았다. 해결책은 민사소송뿐이다. 승소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집주인이 패소해도 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이 재산이 없으면 재산이 생길 때까지, 기약 없는 오랜 시간을 메여 있어야 한다.
집주인에게 힘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공간을 제공하고 현금을 지급하는 계약 관계에서 집주인은 보증금으로 보장을 받지만, 세입자는 그렇지 못하다. 몇 달, 혹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송을 할, 그리고 소송비를 감당할 의지가 없다면 집주인이 자신을 휘두르는 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집이 나가지 않는다고, 줄 돈이 없다고, 혹은 세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힘이, 집주인에게 너무나 쉽게 주어진다. 월세 계약 전 집주인의 품성까지 조사해야 할 판이다. '사람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면, 세입자에겐 이사 갈 자유도, 집 관리 문제로 목소리를 낼 자유도 없다.
남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젠 절대로, 보증금 천만 원은 줘야 한다고 우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