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화하는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삼성반도체 입사 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사망한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고 황유미 7주기 및 반도체 전자산업 산재사망노동자 합동추모 문화제'에서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헌화하고 있다.
유성호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에서 공업용 폐수에 노출돼 다발성 신경병증 피해를 입은 윤아무개씨까지 합하면 올 한 해 법원에 의해 직업병 인정을 받은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은 총 다섯 명이다[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직접 관여하거나 파악하고 있는 사건의 숫자이니 더 있을 수도 있다. 이들 중 고 이윤정씨는 근로복지공단의 불복으로 인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판결에 따르면, 고 황유미·이숙영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확산 및 식각 업무를 하며 벤젠·포름알데히드·아르신·황산 등의 발암물질과 전리방사선에 복합적으로 노출됐다. 정전·설비 고장과 같은 비정상적인 작업환경에서는 보다 높은 수준(고농도)의 유해물질에 노출됐으며, 지속적인 야간 근무와 초과 근무로 과로와 스트레스에도 시달렸다.
또한 유명화씨와 고 이윤정씨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고온테스트 업무를 하며 벤젠·포름알데히드·옥사이드에틸렌·다핵방향족탄환수소·납 등과 같은 유해 화학물질, 극저주파 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등과 같은 유해요소들에 노출됐다. 하지만 이번 판결들에서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이러한 업무상의 유해요인들을 인정하게 된 '과정'에 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이 어려운 이유직업병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업무환경이 질병을 유발했을 정도로 유해했다는 점을 '스스로' 밝혀내야 한다. 그런데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적으로 사측이 관리·보관하고 있으니 문제다.
회사가 애초부터 관련 자료를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거나, 과거 자료라는 이유로 폐기한 경우, 그나마 보관 중인 자료조차 영업비밀이라며 은폐하는 경우에는 노동자가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사실상 매우 어려워진다.
사후적으로 재해노동자의 업무환경을 평가하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아래 산보연)의 역학조사마저 부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입증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이니 '입증책임의 일반원칙(밝혀지지 않은 부분으로 인한 불이익을 노동자에게 지우는 것)'이 도식적으로 적용되면 기업이 산업재해를 은폐하는 것은 매우 용이해진다.
피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자료를 요구할 경우 회사는 "그런 자료는 없다"거나 "폐기했다" 혹은 "영업비밀이라서 줄 수 없다"고 답하면 그만이다. 결국 직업병이 의심되는 질병들은 업무와 관련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업무와의 관련성을 '알 수 없어서' 개인 질병이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이유로 산재 불승인을 받았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경우 피해 입증 문제가 특히 더 심각했다. 역시나 관련 자료의 부재와 폐기, 은폐 그리고 산보연의 부실한 역학조사 때문이다. 예컨대 삼성은 한 라인에서 취급하는 화학물질의 약 78%에 대해 노출평가 자체를 하지 않았고(자료의 부재), 재해노동자들이 근무할 당시의 가스 검지기 경보 기록 등은 모두 폐기해 버렸다고 주장했다(자료의 폐기). 그리고 최근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구 지급현황', '최근 3년간 중대재해 현황'에 대하여 까지 영업비밀을 주장했다(자료의 은폐).
산보연의 역학조사도 문제였다. 조사 담당자의 태만 혹은 사측의 왜곡된 주장에 의해 재해노동자 측이 주장하는 유해요인에 대한 조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명화, 고 이윤정 씨 사건에서도 원고 측이 주장하는 유해요인을 조사하지 않은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서울행정법원 "근로자에게 책임없는 사유는 근로자에게 유리하게"서울행정법원은 "근로자에게 책임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사정은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올해 고 황유미·이숙영씨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과 유명화·고 이윤정씨에 대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바로 그러한 사정, 즉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알 수 없게 된 정황들을 규범적으로 평가했다. 비정상적 작업환경에서의 고농도 유해물질 노출과 관련하여 서울고등법원의 설명은 이렇다.
"삼성전자는 가스 또는 화학물질 모니터링 시스템의 작동 내역 등을 밝히라는 이 법원의 석명에 대하여, 가스 검지시스템의 경우 자료 보관기간이 경과하여 망인들이 근무하던 당시의 기록은 없고, 화학물질 모니터링 시스템의 경우 최근 1년간 10여 차례 작동되었으나 모두 백혈병 등과는 무관한 물질에 관한 것으로 노출 수준도 노출기준 미만이라고만 설명하였을 뿐 그 구체적인 자료는 제출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만으로 비정상 상황에서의 고농도 노출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은 아래와 같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63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음에도 14종에 대해서만 노출수준 관리가 행해지고 있었을 뿐, 나머지 화학물질에 관해서는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산보연은 역학조사에서 벤젠 등 10가지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노출 수준을 측정하였을 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포름알데히드, 에텔렌옥사이드, 다핵방향족탄화수소에 대해서는 측정하지 않았다. 원고들이 질병을 유발한 유해물질로 지목한 고온테스트기계의 배출가스와 검댕에 대하여는 역학조사평가위원회의 일부 평가위원이 이들 물질에 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음에도, 배출가스와 검댕의 유해성을 규명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조사를 종결했다. … 근로자에게 책임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 … 특정 화학물질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이 아직 연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관련성이 없다 또는 낮다는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된다."다만 지난 8월 있었던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엔지니어였던 고 황민웅씨의 백혈병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김은경·송창호씨의 백혈병·림프종에 대해서는 업무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이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의 발암물질에 노출되었고 지속적인 야간근무와 초과근무로 인한 과로·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유해요인 노출이 백혈병 등을 발병·촉진할 정도였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즉 업무 중 유해요인 '노출'은 고 황유미·이숙영씨와 유사하였지만 그 '정도'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삼성의 주장대로라면 삼성은 노동자들이 벤젠·포름알데히드 등에 노출될 '가능성'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벤젠 등에 노출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존재할 리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을 인용하면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유해물질 노출 정도'라는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이니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지만, 서울고등법원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서울고등법원은 김은경·송창호씨가 업무 중에 수시로 취급한 트리클로로에틸렌(TCE)가 종래 2급 발암물질에서 1급 발암물질로 상향 평가 되었다는 사실도 누락한 채 판결했다.
노동자의 산재인정마저 가로막는 상황에서 벗어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