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라시아대륙의 2대 무역로. 위의 것은 초원길이고 아랫 것은 비단길이다.
김종성
중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중국 대륙의 인구도 크게 감소시켰지만, 그보다는 유럽 인구를 훨씬 더 크게 줄였다. 흑사병은 초원길이나 비단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따라 흑해 서부의 발칸반도를 거쳐 이탈리아를 경유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훨씬 더 큰 파괴력을 발휘했다. 14세기 내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흑사병은 이런 경로로 유럽에 전파됐다.
당시 유럽은 위생 수준이 엉망이었다. 청결한 서양인의 이미지는 19세기 중반의 아편 전쟁에서 유럽이 중국을 꺾고 세계 최강이 된 뒤 생성된 것이다. 19세기 이전만 해도 유럽인들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집안에서 용변을 본 뒤 배설물을 창문 너머 길거리에 던져버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위생 수준이 엉망이었던지라,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흑사병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흑사병의 정복... 제대로 된 행정 시스템 없었다열악한 위생 수준 외에 흑사병 피해를 증폭한 것은 유럽 지배권력의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흑사병과 전쟁을 벌일 만한 통일적 행정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정치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중앙의 군주가 아니라 지방의 봉건 제후가 백성과 영토를 통치했다.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정치·군사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다. 봉건 제후와 더불어 백성과 영토를 지배한 또 다른 주체는 종교 개혁 이전의 교회였다. 로마 교황청의 감독을 받는 교회가 봉건 제후와 더불어 유럽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 같은 봉건 제후와 교회는 농민의 생활과 산업 활동을 지배하면서, 이들로부터 세금도 거두고 기사도 모으며 권력을 유지했다.
봉건 제후와 교회가 지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대륙 차원의 전염병에 맞설 만한 강력한 국가 권력이 부재했다. 그래서 개별적인 도시 차원에서 전염병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4세기 이탈리아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럽의 도시 정부들은 오늘날의 정부들이 하듯이 대중의 이동이나 집회를 통제하고 위생 대책을 강구하는 등의 방식으로 흑사병에 대응했다.
하지만 흑사병이 도시 하나를 휩쓸고 그곳 정부 관계자들을 주검으로 만들게 되면, 그 도시를 구할 수 있는 방역 시스템이 현실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적 행정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 간의 협조나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미숙했다. 특정 도시의 행정 시스템이 무너지면, 그 도시는 외부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흑사병에 정복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348년에 이탈리아 중부의 오르비에토에서는 도시 행정을 책임진 7인 위원의 대부분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흑사병과의 전쟁을 지휘해야 할 도시 권력이 사실상 마비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곳 주민 90퍼센트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일부 도시에서는 주민의 모임이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놓고도, 특권층 인사가 대규모 행사를 벌일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해주는 모순을 범했다. 일례로,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인 피스토이아에서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모이는 것을 금지해 놓고도 성직자·기사·법률가·의사 등이 장례식을 여는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해줬다.
이런 행정적 모순으로 흑사병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번졌다. 유럽의 관문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이처럼 부적절한 행정적 대응을 선보이다 보니,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가 훨씬 더 수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