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못 막은 권력, 결국...

[게릴라칼럼] '시스템' 부재가 부른 감염병 재앙, 14세기도 있었다

등록 2015.06.05 09:07수정 2015.06.0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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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최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는 가운데, 정부의 대처법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정부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것. 국민이나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한국 정부의 태도를 비판할 정도다.

전염병은 의술로 극복하는 것이지만, 의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행정적 기술이다. 전염병이 확산되면, 인류와 병원균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집단과 집단이 충돌하는 전쟁에서는 개별 전투원의 화력보다 집단의 조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과의 전쟁에서는 의술 못지않게 행정적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이런 종류의 전쟁이 항상 있었다. 이런 전쟁에서 인류가 항상 승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인류와 병원균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는 모습이 그 점을 증명한다. 이 전쟁에서 인류는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를 14세기 유럽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 유럽의 사례는 우리 정부를 비롯해 우리 시대의 모든 정부를 바짝 긴장시키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14세기에 유럽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에 대한 유럽 지배 권력의 부적절한 대응이 피해를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행정적 대응을 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지 못해 사태를 증폭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체제가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수 있는 전염병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유럽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국가 권력은 보이는 적군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병원균에 대해서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흑사병이 유럽에 남긴 교훈은 그런 것이었다.

전염병 대처, 의학만큼 중요한 행정적 기술  

흑사병은 쥐로 인해 전파되는 페스트균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몸에 열이 나고 피부에 흑점이 생기며 죽어간다. 그래서 흑사병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흑사병' 하면 대개 '중세 유럽'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동아시아를 먼저 연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전염병의 출발점이 1331년 몽골 제국 지배 하의 중국 대륙이기 때문이다. 1331년이면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을 때였다.

그 옛날 중국 대륙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어떻게 유럽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사람들한테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 전인 13세기 중반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은 몽골 제국의 패권 하에 하나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유라시아 상당 부분의 국가는 몽골의 군사적 패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몽골이 주도하는 은(銀) 중심의 국제 무역 질서에도 참여했다.


이런 추상적 시스템 외에,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는 구체적 시스템들도 있었다. 아시아와 동유럽의 경계인 흑해 부근부터 중국 북부까지를 잇는 초원길과 중동에서 중국 중부까지를 잇는 비단길(사막길)이 유라시아 차원에서 인간·상품·정보의 교환을 매개했다.

또 해양에는 세계적 차원의 바닷길은 없었지만, 유라시아 곳곳에서 국지적 차원의 바닷길이 가동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14세기에도 전염병이 유라시아 차원에서 전파되는 게 가능했다.

 14세기 유라시아대륙의 2대 무역로. 위의 것은 초원길이고 아랫 것은 비단길이다.
14세기 유라시아대륙의 2대 무역로. 위의 것은 초원길이고 아랫 것은 비단길이다. 김종성

중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중국 대륙의 인구도 크게 감소시켰지만, 그보다는 유럽 인구를 훨씬 더 크게 줄였다. 흑사병은 초원길이나 비단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따라 흑해 서부의 발칸반도를 거쳐 이탈리아를 경유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훨씬 더 큰 파괴력을 발휘했다. 14세기 내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흑사병은 이런 경로로 유럽에 전파됐다. 

당시 유럽은 위생 수준이 엉망이었다. 청결한 서양인의 이미지는 19세기 중반의 아편 전쟁에서 유럽이 중국을 꺾고 세계 최강이 된 뒤 생성된 것이다. 19세기 이전만 해도 유럽인들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집안에서 용변을 본 뒤 배설물을 창문 너머 길거리에 던져버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위생 수준이 엉망이었던지라,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흑사병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흑사병의 정복... 제대로 된 행정 시스템 없었다

열악한 위생 수준 외에 흑사병 피해를 증폭한 것은 유럽 지배권력의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흑사병과 전쟁을 벌일 만한 통일적 행정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정치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중앙의 군주가 아니라 지방의 봉건 제후가 백성과 영토를 통치했다.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정치·군사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다. 봉건 제후와 더불어 백성과 영토를 지배한 또 다른 주체는 종교 개혁 이전의 교회였다. 로마 교황청의 감독을 받는 교회가 봉건 제후와 더불어 유럽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 같은 봉건 제후와 교회는 농민의 생활과 산업 활동을 지배하면서, 이들로부터 세금도 거두고 기사도 모으며 권력을 유지했다.

봉건 제후와 교회가 지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대륙 차원의 전염병에 맞설 만한 강력한 국가 권력이 부재했다. 그래서 개별적인 도시 차원에서 전염병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4세기 이탈리아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럽의 도시 정부들은 오늘날의 정부들이 하듯이 대중의 이동이나 집회를 통제하고 위생 대책을 강구하는 등의 방식으로 흑사병에 대응했다.

하지만 흑사병이 도시 하나를 휩쓸고 그곳 정부 관계자들을 주검으로 만들게 되면, 그 도시를 구할 수 있는 방역 시스템이 현실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적 행정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 간의 협조나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미숙했다. 특정 도시의 행정 시스템이 무너지면, 그 도시는 외부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흑사병에 정복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348년에 이탈리아 중부의 오르비에토에서는 도시 행정을 책임진 7인 위원의 대부분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흑사병과의 전쟁을 지휘해야 할 도시 권력이 사실상 마비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곳 주민 90퍼센트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일부 도시에서는 주민의 모임이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놓고도, 특권층 인사가 대규모 행사를 벌일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해주는 모순을 범했다. 일례로,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인 피스토이아에서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모이는 것을 금지해 놓고도 성직자·기사·법률가·의사 등이 장례식을 여는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해줬다.

이런 행정적 모순으로 흑사병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번졌다. 유럽의 관문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이처럼 부적절한 행정적 대응을 선보이다 보니,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가 훨씬 더 수월했던 것이다. 

 흑사병으로 인해 확산된 죽음의 공포를 다룬 목판화. 독일 화가 미카엘 볼게무트(1434~1519년)의 작품이다.
흑사병으로 인해 확산된 죽음의 공포를 다룬 목판화. 독일 화가 미카엘 볼게무트(1434~1519년)의 작품이다.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영문판

중세 유럽을 지배한 또 다른 권력은 교회였다. 교회는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지방 분권적인 정치 권력보다 중앙 집권적인 종교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조직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교회의 조직 시스템은 흑사병 앞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례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흑사병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교회 조직이 흑사병을 물리치겠다면서 대규모 종교 행사를 주관했다. 사람들을 분리해야 할 시점에서 사람들을 결집시킨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사람이 흑사병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전염병 대책이라는 관점에서는 상당히 엉뚱한 일을 벌인 것이다.

또 일부 교회에서는, 흑사병으로 교회 참석률이 저조해지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인들을 징계하기도 했다. 성직자 입장에서는 신도들이 교회에 모이도록 권유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적어도 전염병 대책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부 성직자들이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한 게 사실이다. 

이렇게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 어느 쪽도 유럽을 흑사병에서 건질 만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은 이 미증유의 전염병 앞에서 인구의 3분의 2를 잃어야 했다. 그런데 흑사병의 영향은 단순한 인구 감소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유럽인의 삶 자체를 바꾸는 데로까지 이어졌다.

융단 폭격이라 할 수 있는 흑사병의 확산은 중세 유럽의 체제를 붕괴하는 기능을 했다. 이런 결과는 일차적으로 인구의 급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다 보니 농민의 숫자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이 감소하다 보니 농민에 대한 지배로 권력을 향유하던 봉건 영주와 교회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는 봉건영주가 몰락하고 중앙의 군주가 강력해졌다. 이것은 유럽이 다음 시대의 절대 왕정으로 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교회 내부에서는 종교 개혁의 기반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세를 지배하던 교회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양대 권력은 흑사병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결과로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것은 전염병과의 전쟁에 대해 정치권력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염병을 막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정치 권력이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메르스 #중동호흡기증후군 #전염병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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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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