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도의 서산선사라는 사찰에 있는 김성일의 탑. 위의 것에는 학봉이란 호를 따서 ‘학봉탑’이라고 새겨져 있고, 아래 것에는 ‘김성일 공양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종성
하지만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전쟁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엄포를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조만간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조선이 도와달라'는 서한을 통신사의 손에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통신사 일행과 함께 조선에 보낸 일본 사신을 통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통보했다.
일본 군대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가겠다는 것은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디디겠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조선 땅을 침공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마도·일본 대사관 격인 조선주재 왜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기운이 심상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조만간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 점은 명나라도 파악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조선이 협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이 전쟁을 공언하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도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황윤길의 판단은 선견지명이 아니라 평범한 판단에 속했다.
하지만 동인당은 서인당 황윤길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자신들의 정권이 안정된 뒤라면 일본과의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켜 자기 당파의 입지를 공고히 해보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당시는 정권을 잡은 직후였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상황을 안정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동인당은 전쟁 가능성을 축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런 속에서 동인당 정권 내부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순신이라는 무명의 장수를 남해안에 배치하고 성곽을 축조·보수하는 등의 준비 작업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민심을 어수선하게 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런 작업의 상당 부분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나마 이순신이 원위치 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