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낯설다

[마흔 춘천을 걷다 ⑦] 다시 남이섬에서 한해를 돌아보다

등록 2015.12.28 11:02수정 2016.01.0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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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용감히 출마해서 당당히 낙선한 시민운동가, 사회복지사. 대학졸업하고 사회생활 조금하고 결혼하고 마포에서 12년 활동하고 애 키우고 나니 마흔이 되었다. 2014년 말 살고, 활동하던 마포를 떠나 신랑을 따라 춘천으로 귀촌했다. 앞으로 뭐하나? 뭐해서 먹고사나? 은근히 걱정하며 앞길을 모색하는 철없는 아줌마!! 언제까지나 젊을 줄만 알았는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라 나이는 유리장벽임을 느끼고 있다. -  기자 말

다시 춘천 시티투어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사람들이 많다. 모두들 내리는 눈으로 들뜬 것 같다. 춘천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공지천과 춘천 물레길을 지나 남이섬으로 향한다.


창문에는 서리가 끼어 바깥이 잘 안 보인다. 손끝으로 창문을 닦아내자 손이 지나간 자리로 눈이 소복이 쌓인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지붕에도 논밭에도 올라앉은 눈의 향연에 동화 속에 들어간 느낌이다.

'가는 길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대체 남이섬은 얼마나 멋질까?'

벌써부터 기대가 한가득. 춘천에 산다는 게 너무 신난다. 이렇게 LTE급으로 눈 오는 남이섬에 갈 수 있다니.

눈 천국 남이섬이 있는 춘천에 산다는 것

 남이섬 얼음조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남이섬 얼음조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설현정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위에도 눈이 떨어진다. 저멀리 보이는 남이섬 오른쪽의 야트막한 산에는 안개가 중턱에 걸려있어 몽환적이다. 배가 남이섬에 다가가자 남이섬 입구에는 100개도 넘을 작은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다. 길게 뻗은 나무들을 배경으로 솟아나오는 물줄기들은 그 자체로 환상.


추운 날씨 덕에 분수에서 나온 물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얼어 자연 조각품이 되었다. 물은 계속 뿜어져 나오고, 나온 물은 다시 먼저 얼어붙은 자연조각에 부딪혀 제 각각의 모양으로 다시 굳는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열풍으로 외국인들이 많아요. 그런데 일본 관광객은 거의 끝났고요. 중국 관광객도 끝나가고 지금은 동남아 관광객이 대부분이죠."


시티투어 버스 안내사의 말대로 동남아시아 관광객들이 많다. '히잡'을 쓴 모녀 관광객도 보이고. 외국인이 대부분이라 한국말이 주변에서 들리면 반가울 정도다.

 눈쌓인 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눈쌓인 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설현정

여전히 남이섬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바닥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돌 위를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아이들, 얼음조각 옆에서 사진을 찍는 소녀들도 있다. 우산으로 눈 쌓인 바닥에 뭔가 글씨를 쓰는 어린이들도 보인다.

남이섬의 동물들도 신났다. 청설모가 쪼르르 뛰어다니고, 우람한 나무 위 공작새가 제 부리로 몸 단장을 한다. 타조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목을 쭉 빼고 오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드넓은 잔디밭은 아직 연초록빛을 띠고 있고, 그 위로 눈이 내려 연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상큼하다.

메타세콰이어 길, 맑은 고요를 느끼다

 남이섬 메타세콰이어길.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구고 쭉쭉 뻗은 나뭇가지들이 시원하다.
남이섬 메타세콰이어길.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구고 쭉쭉 뻗은 나뭇가지들이 시원하다.설현정

머리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만 그 끝이 보이는 키 큰 메타세콰이어길에 이르렀다. <겨울연가>의 배우 배용준, 최지우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의 포스터가 그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 길은 남이섬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지만 난 거기서 맑은 고요를 느꼈다.

무성하던 나뭇잎은 다 떨구고, 마지막 자존심인 듯 휘어진 곳 하나 없이 쭉쭉 뻗은 가지들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과 그 가지들 사이에 먼 허공을 보았다. 그 순간 아무도 곁에 없는 듯 땅과 하늘 그리고 나무들과 나 자신만이 이 공간에 있는 듯했다. 순식간에 올 한 해가 빠르게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아! 그래. 올 봄 아직 쌀쌀하던 그날 여기에 서 있었지. 그래. 그때는 내가 한 해를 이만큼 역동적으로 보낼 줄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 그때의 너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2015년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게 될지. 얼마나 많은 꽃을 보게 될지. 하늘의 표정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지. 농사를 지어 팔아서 먹고산다는 것에 대해 지금 같은 시림과 자부심을 가지게 될지. 그래. 그때의 너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아! 얼마나 통쾌한지. 아 얼마나 놀라운지. 아 얼마나 신기한지."

짧은 한 순간 뇌리를 스치는 이런 느낌이 놀라웠다. 한해가 가기 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남이섬 정관루의 정원
남이섬 정관루의 정원설현정

메타세콰이어길 끝에 맞닿아 있는 섬의 가장자리는 청평호가 잔잔하다. 강 건너 야트막한 산에는 안개가 내려 앉아 있었고, 그래선지 멀리 있는 산은 안개 속에 가려 더 아득했다. 호수는 신비로웠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신랑과 팔짱을 끼고 걸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눈사람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호숫가를 걷다보니 정관루(남이섬 안의 호텔)가 나타났다. 이곳 가운데 있는 정원은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가운데 연못이 있고 호수의 물이 연못으로 흘러 들어와 다시 호수로 흘러나가는 자연을 그대호 활용한 연못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눈이 소복히 쌓인 길도 나타났다. '또독, 또독' 눈 밟는 소리는 참 좋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걸로 보이는 자작나무 숲도 만났다. 검은 빛과 은빛 나무 표피의 조화가 멋지다. '얼마 후면 이 나무들이 자라 눈부신 자작나무숲을 보여주겠구나' 싶어 벌써 기대가 되었다. 남이섬은 걷고 걸어도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평상시에는 육지였다가 홍수가 나면 섬으로 변하던 불모의 땅, 여기에 한 사람이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남이섬이 되었다고한다. 사람의 꾸준한 노력에 세월이 더해지면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남이섬이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올 봄, 나는 이곳 남이섬에 왔다. 그때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런 나에게 남이섬은 '인생도 여행처럼, 그걸 대하는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빛깔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줬다.

이제 다시 한 살 먹어야 하는 마흔 살의 연말. 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낯설다. 하지만 이곳 남이섬에서 마흔 살로 살았던 2015년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어서, 그리고 뿌듯함을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
덧붙이는 글 지난 23일에 다녀왔습니다.
#남이섬 #겨울 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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