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토론 참석한 대선후보들중앙일보-JTBC-한국정치학회 공동주최 2017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가 25일 경기도 고양시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열렸다. 토론시작 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유승민 국민의당 후보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이제 2017년 촛불 대선이 시작됐다. 촛불의 힘은 한국 정치의 영원한 상수가 될 것 같았던 수구·보수 정당의 허리를 동강 냈다. 허리 잘린 구여권을 밟고 구 야권 후보 두 명이 선두를 다툰다. 촛불 이전에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울한(누구에겐 기쁜)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촛불은 판을 뒤집어 놓았고, 이제 어떤 정권교체인가를 따지게 됐다.
'민주화' 이후 30년 한국의 다수 유권자가 당선시킨 대통령은 6명이다. 번갈아 집권했던 여야 정당과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게 지금 우리 사회다. 내가 살고 싶어 했던 사회가 아니다. 다수가 행복하지 않다. 내 아들뻘 되는 젊은이들이 만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절망의 조어를 접했을 때 미안했고, 눈물이 났다. 젊은 시절 내 삶에도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상 속에서도 저런 조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청춘의 미래를 잡아먹고, 희망은 소수만 누리는 사치가 돼 버린 우리 사회의 노선을 확 뜯어고치자는 게 촛불의 염원이었다.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서 제대로 된 나라로.' 대통령 하나 바꾸는 걸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는 외침은 배반의 경험을 겪은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절규였다. 재벌 중심 노선, 자본 중심 노선, 개발 중심 노선, 성장 제일 노선, 시장 지상 노선을 전면 수정하라는 명령이었다.
기존의 노선이 한때 일정 부분 유효했다 해도 이제는 아니다. 버스 노선은 그대로인 채 운전하는 사람만 바꾸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그 버스가 지나다니는 동네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두려움 없는 노선 전환, 거침없는 개혁 노선으로 갈아탈 때가 바로 지금이다.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지만, 자주 켜지는 것도 아니다. 5월 9일 한 장씩 받게 되는 투표용지는 초가 되고, 붉은 인주는 불이 돼, 청와대와 여의도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게 해야 한다.
'촛불 후보'를 자임하는 심상정은 대한민국호가 60년 동안 달려왔던 노선을 확 바꾸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은 '심상정 후보 말이 맞긴 한데' 라면서도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 투표는 다른 후보한테 하지만 마음은 심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도 많다. 그다음은 '지못미'일 터이다.
이런 생각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선택을 앞두고 민주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염원하는 많은 보통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의 가족 중 한 명도 이 문제로 현재 고민 중이다. 이성적 토론으로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다. 내가 아들과 이 문제를 두고 토론하면서 한 이야기 중 한 조각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문재인 후보 당선이 아니라, 문재인 당선 이후다. 문재인의 목표는 대통령 당선이 아니라, 성공한 대통령이어야 한다. 성공은 강력한 경쟁자를 필요로 한다. 당락에 위협을 주는 경쟁자, 당선 후 우회전의 유혹을 버리고 왼쪽으로 아래쪽으로 향하게 끌어올 수 있는 경쟁자가 필요하다. 우회전 유혹이 없더라도, 특히 정당 분포로 볼 때 오른쪽으로 잡아끄는 힘이 세다. 자유한국당과 경쟁하는 집권당과 정의당과 경쟁하는 집권당을 생각해 보라. 또 후보들의 득표율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선거의 출발점이다."
여섯 번 투표, 사표는 없었다이번 선거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사표론. 하지만 나는 30년 동안 대통령 선거 여섯 번 하면서 투표한 내 표 중에 죽은 표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1987년 김대중 후보 득표수 611만3375표(27.0%)와 2012년 문재인 후보 득표수 1469만2632표(48.02%) 속에 내 한 표는 기록돼 있고, 진보정당 득표율이 1.2%에서 3.9%로 늘고, 국회의원이 10명이 된 것은 수많은 나 같은 한 표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표는 살아서 진보정당 발 무상 시리즈 정책을 현실화시켰다. 또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1인 2표제), 종합부동산세(부유세), 무상 영유아 예방접종,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저상버스, 주민소환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에너지기본권 개념(에너지 기본법) 등을 도입시켰다. 진보정당이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진보정당이 없었으면 불가능하거나 더 지체될 성과들이다. 내 한 표는 거기에 쓰였다.
"민주·새누리 복지 공약, 알고 보니 민주노동당 것 다 베꼈네" 지난 대선이 있었던 2012년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칭찬이 아니라, 두 정당을 비아냥대는 기사였다. 당시 거대 양당은 이처럼 <조선일보>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정책을 베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정당의 공약은 거대 양당이 오랫동안 외면해온 다수 국민들의 요구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유승민 후보가 내걸어서 환영을 받았던 '칼퇴근법'도 2008년 진보정당의 총선 공약이었다.
내 표는 이렇게 펄펄 살아서 움직였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일당백을 행사한 표다. 덩치 큰 정당 사람들이나 수심 깊은 보통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면서 던진 한 표들이 한 역할이다. 진보정당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진보정당과 그 후보들이 서민,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덩치 큰 정당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공은 대부분 마지못해 나선 그들에게 돌아갔지만.
다수 국민의 절실한 요구는 정치적 의제로 등장하지 못하면 없는 것이 된다. 2004년 진보정당이 국회 들어가면서 '거대한 소수'를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의도 의석은 소수지만 여의도에서 대표되지 못했던 거대한 다수를 대변하는 임무를 최우선하겠다는 의지였고, 그것은 노력한 만큼 실현됐다. 사표라 눈총받던 표야말로, 높은 수익률로 되돌아온 우량 표였다.
진짜 사표는 '깡통표'다이에 반해 지금은 네 개로 쪼개졌지만, 과거 거대 양당 시절 대통령 후보들이 공약을 통해 약속한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가 올 것으로 믿고 찍은 표들은 결과적으로 '사표'가 됐다. OECD 국가 중 출산율 꼴찌, 자살률 1위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는 그 표들이 수익률 마이너스인 '깡통표'가 됐다는 걸 말해 주는 증거다. 아무도 그런 사회를 바라고 표를 주지 않았다. 이제 노선이 다른 버스를 타야 할 때가 왔다. 행선지가 다른 표를 끊을 때가 왔다. 과감하게 새로운 노선을 개척할 때가 왔다.
제도적으로 사표를 양산하는 선거 시스템 문제는 여기서 길게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사표를 넓게 해석해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모든 표라고 하면, 그것은 승자 독식 선거제도의 산물이다.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와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통해 단 하나의 사표가 존재할 수 없도록, 복수의 경쟁하는 정당이 사표론에 억압받지 않도록 하면 된다.
나는 지금까지 치렀던 6번보다 적은 횟수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사인(死人)이 돼 사라지지만 내가 던진 표는 사표가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대통령 선거를 하기 전까지 '이생망'이라는 슬픈 조어가 사라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내 한 표는 이번에도 그것을 위해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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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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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라 눈총받던 표, 높은 수익률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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