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청봉이 사진을 촬영한 위치에서 10여 미터만 나서면 너덜로 이루어진 끝청봉이다. 이 봉우리에서 오색방향으로 500m 아래에 오색↔끝청봉 간 케이블카를 설치할 때 상부정류장을 조성하고 끝청봉 직전 조망이 가능한 지점까지 고공으로 탐방로를 만든다는 계획이 오래전부터 양양군에서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추진됐다. 지금 이대로 통제를 해도 등산을 하는 이들이 숨어서라도 산행을 하며 쓰레기를 버리고 자연을 간섭하게 하느냐와, 고공으로만 이동하는 방법으로 자연과 사람의 공생을 도모하는 방법이 좋으냐는 보다 충실하고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정덕수
끝청봉 직전의 능선은 5월 24일 촬영한 사진이 가장 좋아 그때 촬영한 사진으로 소개한다. 지난 5월 16일 통제 기간이 해제돼 곧장 그날 대청봉을 올랐지만, 그땐 점봉산과 달리 해발 1400m 위로는 나뭇잎도 피지 않아 촬영을 포기했다. 그리고 5월 24일, '구름이 끼지만 대체로 날씨가 맑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오전 10시가 넘어 오색에서 대청봉을 올라 한계령으로 내려오는 길을 걸었다. 그때야 해발 1500m 지대까지 진달래가 피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저녁나절엔 봉정암에서 틀어 놓은 독경 소리까지 들린다.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북쪽으로 가깝게 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중청봉과 대청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서쪽으로는 바로 앞의 끝청봉과 멀리 귀떼기청봉까지 장쾌한 설악의 산세를 드러낸다. 물론 귀떼기청봉과 마주하여 남쪽의 가리봉과 주걱봉도 한눈에 볼 수 있고, 인제군을 넘어 홍천군의 산들까지 날씨만 사진처럼 좋다면 어렵지 않게 조망된다.
간혹 산에서 만나 동행한 이들에게 그들의 걷는 속도를 고려해 '어떤 풍경이 보일 때 촬영하며 잠시 기다리면 그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설악산을 얼마나 자주 올라왔기에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한다. 1년에 50회 이상 올랐다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이미 지난 5월 16일부터 10번을 대청봉을 올랐고, 한계령으로 하산한 것도 4번이다.
1980년대엔 오전에 대청봉을 다녀왔는데 다시 올라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오후에 오른 적도 있고, 밤중에도 필요하다는 물건을 구입해 가져다준 적도 있다. 그때만 해도 올라가는 길에 20여kg의 짐을 지고도 3시간 정도면 대청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벼운 배낭을 졌을 땐 1km를 12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으나 요즘은 꼭 그 곱절의 시간이 걸린다.
물론 사진 촬영을 작정하고 나서면 장소에 따라 다른 촬영에 알맞은 시간에 맞춰 걷다 보니 한계령 통제소 바로 위 바위에서 일몰을 볼 때도 있다. 솔직히 석고덩골 상단부와 한계령갈림길 중간 지점의 전망 좋은 곳이나 끝청봉에서 일몰의 근사한 풍경을 촬영하고 싶지만 그러면 하산 자체가 너무 늦어 아직 시도하지 못했다.
산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갑게 보이는 곳도 막상 걸어보면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아주 멀리 보이던 봉우리도 20~30분에 지나치게 된다. 촬영하고 끝청봉으로 나서는 길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지만 막상 걷다 보면 5분은 기본이고, 동행한 이의 걷는 보폭에 맞추다 보면 10분도 더 넘게 걸린다.
설악산이 맺어준 인연, 박영석 대장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걸 13살 무렵부터 시작한 40여 년의 등산 경험을 통해 배웠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당시 고등학생이던 박영석(1963년 11월 2일~2011년 10월 18일)과 인연도 그 덕에 맺었다. 사실 박영석은 나보다 나이로는 1살 위지만 생일로는 3달 정도밖엔 차이가 없어 친구가 됐다.
여름 방학을 맞아 오색에 온 그와 주전골을 몇 번 오가며 설악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하루는 아침을 먹고 찾아가니 "영석이가 너한테 간 거 아니냐"며 어른들이 걱정하고 계셨다. 주전골을 한달음에 돌아봤지만 어디에도 그 친구는 없었다.
다시 돌아와 "아마도 영석이가 대청봉엘 올라간 거 같습니다"라고 하자, "서울에서 와서 산은 올라가 본 적도 없는 얘가 혼자서 아침도 안 먹고 대청봉을 올라갔겠니. 다시 한번 동네 어디에서 놀고 있는지 찾아봐"란 답을 들었다.
며칠 전 대청봉을 올라가는 길들에 대해 꼬치꼬치 묻던 그를 기억하기에, 반신반의하며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을 향해 마을의 맨 위에 있는 호텔까지 갔다. 마침 막 내려오는 박영석을 만날 수 있었다.
"대청봉 다녀오니?""응.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곧장 올라갔는데, 네 얘기대로 중간쯤에 계곡에서 물을 마시고 정상에 올라가니 이미 해가 떴더라. 그래서 곧장 어른들 염려하실까봐 얼른 내려왔어."염려했던 어른들은 아침밥도 먹지 않고 대청봉을 올라갔던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별말씀 없이 밥을 차려주며 "다시는 그렇게 말도 없이 산에 올라가지 말고, 다음엔 꼭 이야기를 하고 도시락이라도 챙겨서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산과 인연을 맺은 그와는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났다. 설악산의 천불동에 있는 설악골 앞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대학 산악부원들 몇 명이 암벽장비를 어깨와 배낭위에 걸치고 골짜기에서 내려오는데, 거기에 그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산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열여덟 하얀 피부를 지녔던 도시 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땀에 전 얼룩진 얼굴에 몇 올 수염이 간지럽게 자란 수염을 보며 "웬만하면 물도 많은데 좀 씻지"라고 하자, 그는 "습관이 돼서 이젠 괜찮아"라며 멋쩍게 웃어 보이곤 동료들과 서둘러 내려갔다.
그러니까 박영석은 안나푸르나에서 영원히 잠들 때까지 31년을 산엘 올랐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14좌 완등과 3극점 탐험에 7대륙 최고봉 등정이란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 됐다.
박영석처럼 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다니며 산악활동을 했다면 과연 그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을까? "덩치 크다고 산을 잘 오르진 않잖아. 너도 만만치 않은데 왜 그래"라며 어깨를 툭 치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어 보이던 박영석.
이젠 어디서도 만날 수 없지만 난 여전히 설악을 오르내리며 그를 추억한다. 서북주릉을 함께 걷자고 약속했었지만 영석이는 늘 설악을 찾아도 저녁나절 어둑한 시간에야 대피소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각자의 길로 헤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