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 합동타격훈련을 참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실내 감시소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을 조선중앙TV가 지난 2월 29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이며, 책상에도 담배와 장갑만 보인다.
연합뉴스=조선중앙TV
코로나 19 확산으로 동북아 국가들이 피해를 보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확진자에 관한 보고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18일에는 오춘복 보건상이 조선중앙TV에 출연해, 북한에는 감염자는 물론 의심환자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은 한국·중국과 접해 있고 일본을 바다 건너에 두고 있다. 그런 북한에서 확진자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니,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영양상태가 낮은 것은 물론이고 의료 시설도 많지 않으므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북한이 실태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도 나오고 '진단 장비가 없어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번 3·1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도 보건 분야의 공동 협력을 바랍니다"라고 언급한 것도 남쪽 사회의 우려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감염병이 창궐했던 3.8선 이북
인간의 건강에 최적화된 공간은 다름아닌 집이다. 인간이 집을 떠나 장기간 이동하거나 큰 무리의 집단과 합류하게 되면, 면역력이 약해지고 바이러스에 취약해지기 쉽다. 전쟁처럼 대규모 인구이동을 수반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감염병(전염병)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45년 8·15 해방 역시 대규모 인구이동을 수반하는 격변이었다. 해외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해방을 맞아 대거 귀국했다. 감염병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더해, 조선총독부가 물러나고 미군정청이 들어서는 과도기적 상황은 행정 공백 또는 행정 시스템 약화를 초래했다. 이는 해방 직후의 한국이 감염병과의 전쟁에 취약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38선 이북은 남쪽보다 의료 시설이 훨씬 부족했다. 그래서 해방 직후의 38선 이북은 감염병에 훨씬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2017년에 <연세 의사학> 제20권 제2호에 실린 김진혁의 '북한 전염병사 연구(1945-2000)'는 이렇게 보고한다.
"소련 제25군 위생부대장은 1945년 8월 20일, 38선 이북 5도에 장티푸스·발진티푸스·이질·재귀열·두창·성홍열·디프테리아·홍역 등의 전염병 발생, 지역 인구 50~70%의 이(lice) 보유, 약국의 폐쇄를 보고하였다. 아울러, 해방 직후 북한에서 전체 42개 병원 중 19개만이 운용 중이었다."
38선 이북의 보건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1944년에 비해 1946년에 "이질이 약 2배, 장티푸스가 약 3배, 두창은 약 11배, 발진티푸스가 약 4배, 재귀열이 약 3배, 디프테리아 약 2배와 같이 급격하게 이병률(罹病率)이 늘어났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이런 상황은 북한 정권이 감염병 문제에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이에 더해 남한에 비해 덜 분열적이었던 북쪽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남한 정권에 비해 북한 정권은 좀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미군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의혹도 북한의 감염병 관리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에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감염병 사태는 미군이 세균전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부인했지만, 북한을 현지 조사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와 더불어 북한·소련·중국 당국에 의해 이 의혹이 확산됐다.
의혹 확산에 앞장선 것은 소련이다. 국방부 전사(戰史)편찬위원회가 1989년 발행한 <한국전쟁 휴전사>는 "1951년 12월 중순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는 유엔군 측이 유독성 가스를 살포하였다고 비난한 바 있었는데, 1952년 2월에는 소련의 모스크바방송이 '유엔군 측이 북한 지역에 간첩을 보내어 우물에 독약을 넣고 천연두·장티푸스균을 살포했다'고 주장하였다"고 설명한다.
후지메 유키 오사카대 교수는 2001년 1월호 <민족 21>에 기고한 글에서 미군의 세균전 의혹을 두고 "그 세균 무기가 2차 대전 중 일본군이 사용한 것을 개발한 것이라는 의혹을 그때부터 받고 있었다"며 "미군의 세균 병기 사용을 확인한 1952년 국제과학위원회의 조사는 옛 일본군의 세균 무기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고 말한다.
비밀 참전한 일본군에 의해서도 그 같은 세균전이 벌어졌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제목이 '일 731부대 한국전 참전, 인민군 포로에 생체실험'인 위 기고문에서 후지메 유키는 하야시 시게루오의 <주한미군>이란 책을 인용해 "옛 731부대 관계자의 대미 협력은 일본 내지에서의 정보 제공이나 세균 매체(쥐) 제공, 세균 배양에 그치지 않는다"며 "미군이 생포한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포로를 이용한 세균전 인체실험의 실시와 세균병기 완성을 위해 일했다는 정보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
미군이 정말로 세균전을 벌였든 아니든, 그런 의혹이 널리 확산됐기 때문에 북한은 감염병 문제에 더욱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직후의 열악한 의료환경에 더해, 한국전쟁 당시의 세균전 의혹이 북한 정권을 한층 예민하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이후에 북한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위의 김진혁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7년부터 국가에서 전염병 치료와 백신접종을 무료로 실시하였고 전염병연구소에서 콜레라, 장티푸스 백신과 두창, 디프테리아 혈청 등 백신 25종을 생산했다."
"북한 당국은 식민지 시기의 대중이 서양의학의 혜택에서 배제되어 질병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고 판단하고 미신퇴치 운동과 위생선전교양을 실시하였다."
위와 같은 조치들의 결과로 "북한의 전염병 관리는 남한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빠르게 발전"했으며 "1950년대부터 기생충 전염병 관리와 위생환경 개선에 노력했고, 1960년대 이미 만성전염병 관리에 주력"하게 됐다고 위 논문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