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한 대구 시내 출근길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으로 대구에서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재택근무 등을 권하며 2월 27일 오전 9시께 대구시 남구의 한 도로가 한산한 모습을 보인다.
연합뉴스
2월 18일 대구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고 나서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연일 대구경북에서만 확진자가 수백 명씩 쏟아져 나왔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바로 다음 날 서둘러 종업식을 했다.
우리 가족은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의 친정 부모님 댁만 왕래하며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지내게 됐다. 걸어서 2분 거리인 옆 동이지만 부모님 댁에 갈 때도 장갑과 마스크는 필수가 됐다. 아이에게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기대지 마라, 하고 잔소리를 했다. 옷은 빨래 건조기에 넣고 돌릴 수 있는 것들로만 입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면 바로 장갑과 겉옷은 건조기에서 고온으로 20분 정도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지만,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우리 나름의 장치였다.
아이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단어를 매우 정확하게 구사하게 됐다. "코로나바이러스와 미세먼지가 어떻게 다르냐면..." 하며 어린이집에서 배웠던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어린이집 선생님 놀이는 긴 시간 집에서 지내며 하는 놀이 중 하나가 됐다. 아이가 이 바이러스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속상하기는 하지만, 뭐 어쩌랴. 이제는 아는 것이 힘인 것을.
바깥 외출은 아이를 맡기고 다녀온 집 앞 슈퍼, 그리고 너무 답답해서 차를 타고 팔공산 드라이브를 다녀온 게 전부였다. 팔공산에 가서도 내리기가 무서워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워 두고 차창을 통해 시원한 공기를 마실 뿐이었다.
'주말가족'으로 지내던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떨어지지 않고 함께 생활했다. 삼시 세끼 집밥을 해 먹으며, 부모님 댁에 가서 시간을 보내며, 매일 오롯이 우리 세 식구, 그리고 친정 부모님과 함께 자발적 자가격리를 실천하며 꼭 달라붙어 있었다.
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3월 1일, 남편은 다시 떠났다. 이직한 곳 역시 대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다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첫 출근일은 3월 16일이었지만 남편은 일을 시작하기 전 그곳에서 자발적으로 2주간 자가격리를 하고자 일찍 짐을 꾸려 출발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은 지금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서로의 안전과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위해 남편은 코로나19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곳에서 이동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떠날 때도 아이에게 예전처럼 '몇 밤 자고 올게'라고 약속하지 못한 채 기약 없이 현관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때 주말가족이었던 우리는 이제 그마저도 이룰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이와 함께 아예 친정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재택근무를 한다. 아이는 아빠가 보고 싶다며 거의 매일 영상 통화를 건다. 그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엄마, 아빠는 몇 밤 자면 와?" 하고 묻는다. 그러고는 금세 "아, 코로나바이러스가 다 없어져야 올 수 있지"라며 자문자답을 한다.
잠들기 전 아이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으며 말한다.
"엄마, 코로나바이러스가 빨리 다 없어져서 아빠가 집에 오게 해 달라고 우리 기도할까?"
어느 날은 내 목을 말없이 끌어안더니 "엄마랑 아빠랑 우리 가족 모두 예전처럼 같이 살면 좋겠다"라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