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암을 찾은 소들구례 오산(해발 531m) 사성암에 10여 마리의 소가 찾아왔다.
사성암 제공
얼마 전 전남 구례에서 3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섬진강의 홍수로 위험을 느낀 소 떼는 축사를 탈추해 족히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해발 531m의 사성암까지 도피했다고 한다.
이 소들이 사성암 대웅전 앞에서 조용히 풀을 뜯으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보도된 후, 큰 화제가 되었다. 주인과 함께 다시 돌아가면 결국 도축이 될 운명임에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소들. 세상에 나는 그 소들과 안면을 트고 말았다. 안심, 등심, 갈빗살에서 '소'라는 한 생명체로 무게 중심이 확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올해 박쥐 등 동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끔찍한 동물 공장'의 실체를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올 봄 서산으로 여행 갔을 때, 언덕 위에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가 생소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생소하게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적 '동물 사육'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각종 패스트푸드점 햄버거의 패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닭과 소들이 어떻게 사육되는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편안함이 좋아 그저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이 불편해지자 그제서야 동물들이 느꼈을 고통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홍수를 피해 사찰로 향했던 소 떼들... 사찰에는 사물(四物)이 있다. 법고를 두드려 들짐승을 깨우고, 목어를 두드려 물고기를 깨운다. 운판을 두드려 날짐승을 깨우고 마지막으로 범종을 두드려 인간을 깨우는 불교의식이라고 한다.
나의 삶만큼이나 소중한 어떤 삶
들짐승을 먼저 깨우고, 최상위 포식자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깨우는 감수성에 주목하자… 사물과 관련된 의례적 절차에는 '일체개고'나 '자비'와 관련된 싯다르타의 가르침과, 모든 존재에 대한 발원이 녹아있다. 토끼를 깨우면서 스님은 무의식적으로 발원을 한다. '오늘은 싱싱한 풀을 많이 먹고 독수리를 조심하렴!'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식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고통이라는 감수성이다. 그다음에 운판을 두드려 독수리를 깨우며 스님은 발원한다. '오늘을 배곯지 말고, 인간에게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렴!' 독수리도 배고픔과 포획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비의 마음이다.
강신주 작가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에 나오는 글이다. 결국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잡아 먹히지 않았으면 하는 애절함이 느껴진다.
사찰에서의 식사는 '공양'이라고 한다. 공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 물을 부어 김치 등을 이용해 그릇을 깨끗이 설거지하듯 닦은 후 그 물을 모조리 마셔야 한다. 비위가 약한 나는 그 행위가 싫어서 '왜 그럴까'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음식물을 버린 만큼 배고픔의 고통이 빨리 찾아올 것이고, 그만큼 다른 생명체를 죽여야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 아랫배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불룩하게 나온 배. 살기 위해 먹은 날보다 쾌락을 위해 먹은 날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