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지난 3일 오전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유성호
수많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한 사람의 '부재'를 더욱 크게 실감하게 되며, 동시에 그 죽음에 대해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민주화운동 열사'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했다. 이처럼 호명은 분명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곡진한 애도의 방식이며, 그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민들레>의 명단 공개에선 처음 사망자 숫자를 듣고 나서의 망연함, 그 이상 그 이하의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득했다.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얼굴 사진이 있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각각의 구체적인 서사, 삶을 통해 남긴 의미, 빛나고 찬란했던 순간들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명을 함에 있어서 가장 힘이 센 주체는 결국 살아생전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은 이의 삶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또 부재에 대해 안타까워 할 때 이름은 비로소 힘을 가지게 된다.
'명단 공개'에서 유가족의 동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체로 고인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온갖 '희로애락'를 고인과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떠난 이의 세계를 잠시나마 되살리기 위해선 '누가' 부르냐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들레>가 공개한 유가족의 동의도 안 받은 희생자 명단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망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서 그들 각자의 존재와 맞닿게 하지 않으면 '전시' 혹은 '박제'나 다름없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부른다고 죽은 이들을 더 깊게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 자의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