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보람씨가 중학생 때 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
유족 제공
최씨는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나고 자랐으나 중·고교 유년시절은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던 작은 아버지가 '미국에 와서 영어도 배우고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해보겠다'며 어린 나이에 훌쩍 떠났다. 그렇게 6년을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위치한 켄우드(Kenwood) 중·고교에서 수학하며 자랐다.
6년 동안 그를 돌봤던 작은 아버지 최경석씨는 "미국에서의 보람이는 약간은 내성적이고 또 착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음악과 사진찍는 걸 좋아했고, 패션잡지도 정기구독해서 열심히 들여다봤다"며 "god나 H.O.T. 같은 가수에 너무 푹 빠져 있어서 '여기서 공부할 건 해야지' 하며 많이 혼냈던 것도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될 즈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귀국을 만류했으나 최씨는 이를 강하게 뿌리쳤다. 이유 중의 하나가 할머니였다. 부모님 사정으로 최씨는 갓난아기 때부터 친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컸다. 최씨의 고모 최경아씨는 "할머니도 너무 그립고, 한국도 너무 그리워했다"며 "'내가 미국에 있는 와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느냐'며 반항도 크게 했다"고 기억했다.
최씨가 한국에서 처음 선택한 진로는 사진이었다. 백제예술대학 사진학과에 진학해 공부하다 중간에 그만뒀다. 최경석씨는 "사진을 참 좋아했는데, 고된 업무 환경 등 사진 업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딪혀 중간에 포기를 하고 영어강사 쪽으로 진로를 틀어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대 중반부터 숨을 거두기 전까지 10년가량을 꾸준히 영어교사로 일했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최씨는 "내가 유치원에서 가장 예뻐하는 애기"라며 자신의 SNS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종종 올렸다. 자신이 찍은 풍경 사진도 꾸준히 SNS에 게시하며 한때 동경했던 사진에 대한 관심도 계속 드러냈다.
지난 3월 보람씨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최경아씨는 "할머니가 엄마 같은 존재였을 텐데, 할머니를 보내면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사망 전 할머니 모습에 대해 최경아씨는 "엄마가 밤에 잠을 잘 때마다 보람이 이름을 말하는 섬망 증세를 보였다"며 "'보람아 내가 너한테 돈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똑똑한 애니까 네 공부는 다 시킬 거다. 어찌 됐든 공부 더 시킬 거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라'라고 밤마다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둘은 많이 다투면서도 참 돈독했다. 싸우는 걸 보면 영락없는 모녀의 말다툼이었다"며 "보람이가 '할머니 이리 와. 이거 먹어야지. 야채 먹어야지'라고 잔소리를 할 때면 '야 네가 남편 같다?'라고 농담을 쳤던 게 기억난다"고도 덧붙였다.
"유족 충분한 애도·위로받지 못하게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