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두 자매 고 강순복(52)·강금복(47)씨가 어릴 적 찍은 가족 사진. 뒷줄 맨 왼쪽이 강금복씨, 그 오른쪽이 강순복씨다. 그 오른쪽은 차례로 첫째 딸 강길복(61)씨, 둘째 아들 강영남(56)씨. 앞줄은 어머니 김분옥(80)씨, 아버지 강규동(87)씨다.
김성욱
영남씨가 정착하자, 첫째 딸 길복씨와 셋째 딸 순복씨도 한국으로 향했다. 12년 전쯤이다. 길복씨는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직원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사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 신림동에 집을 구한 순복씨는 서울 서초구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김밥집에서 8년 동안 일하며 부모님께 돈을 부쳤다.
"동생이 하도 하루 종일 서서 김밥을 많이 말아서리, 팔뚝이랑 장딴지 근육이 어지간한 남자를 초과했었지요." 영남씨가 공사장에서 그을린 자기 팔뚝을 누르며 말했다. "나이 먹고 김밥은 너무 힘들다고서리, 이젠 고조 앉아서 하는 쉬운 일 좀 하고 싶다고 동생이 직업소개소를 알아봤지요."
김밥집을 나온 순복씨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탕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용직인 영남씨가 일거리가 없어 쉴 땐 동생 순복씨가 오빠에게 사탕 공장 일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복씨도 지난해 말 사탕 공장을 퇴사해야 했다. "잔업이 적어서리 돈벌이가 작더래요." 영남씨는 동생 순복씨가 6~7개월째 화성의 다른 공장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무슨 공장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막내 딸 금복씨가 한국에 온 건 언니 순복씨가 사탕 공장을 떠나 새 직장을 구하던 작년 말 무렵이었다. 그전까지 중국에서 주부로만 살아온 금복씨가 한국행을 결심한 건 열여덟살 된 딸 때문이었다.
"금복이 딸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해서 5살에 베이징에 가 영어시험도 치고 그랬지요. 금복이가 학원도 엄청 데리고 다니고 교육에 신경 많이 썼더래요. 근데 그 딸이 이제 다 커서 영국으로 유학 보낸다고, 돈이 더 필요하다고 남편 따라 온 게지요. 지금껏은 고조 금복이 남편 혼자 한국에서 인테리어 일을 했거든요."
영남씨의 설명에 어머니 김분옥씨가 고개를 떨궜다. "금복이 가가 작년까지 중국에서 우릴 많이 돌봤지." 김씨가 말했다.
"우리는 중국에 있어도 계속 영상 통화를 하니까 자식들이 항상 옆에 있는 것 같았지요. 야들은 이틀을 안 넘기고 연락이 와요. 거기다 금복이 가가 한국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순복이랑 같은 공장에서 일한다고 그랬어요. 늦게 떠난 막내가 언니랑 같이 있다니까 걱정을 덜 했지요."
순복씨와 금복씨가 함께 일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이었다.
"달아나라, 한 마디만 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