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
작가회의 제공
시란 인식의 전환을 끌어내는 일이어서, 좋은 시를 접하면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야 만다. 그것을 일종의 혁명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렇기에 과거에는 시인이 일종의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자들을 의미했다. 시란 머물기를 거절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이 각 시편의 시 쓰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격렬한 변화와 갱신은 각 편의 시 내부에서 스스로 이뤄지는 법이다. 생명이 긴 시란 세월과 더불어 계속 새로워지는 시이며, 그 세월 속에서 독자와의 화학반응을 통해 이전과는 달리 읽힐 힘을 얻는 시를 가리킨다. 가령 김남주의 시처럼.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잿더미> 부분
김남주의 이 시를 그의 절창 가운데 하나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처음 읽으며 전율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는 대학생이었고, 대체 시가 무엇인지 한참 고민하던 때였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 이런 걸로도 되는구나.'
이런 것이란 이토록 추상적이고 많은 것이 생략된 말하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된다는 것은 그 생략된 말하기가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꽃과 피라는 지극히 단순한, 심지어는 낡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저 은유가 맥동하는 리듬과 더불어 실체를 얻어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끔 하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하며 우리의 삶으로 틈입해 온다.("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잿더미>) 관념이 육체와 영혼을 얻은 뒤 도달하는 곳은 '보리'와 '잡초', '누룩'과 '죽순', 그리고 '죽창' 등으로 표상되는 구체적 삶의 자리다. 이 자리에서 구분되어 있던 '피'와 '꽃'은 하나가 되어, "꽃속에 피가 흐른다"는 전기적인 선언이 도출되는 것이다.
리듬을 통해,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통해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자리에 선명한 삶의 현장이 자리 잡고, 다시 그 현실은 시적 승화에 힘입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감각이었다.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날 선 감각이 마주하는 순간, 그 순간 가능해지는 놀라운 경이로움, 그런 것이 김남주의 시에는 있었다.
감탄 뒤에 오는 곤란함
그것은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본디 길항할 수밖에 없을 시와 현실이 시인의 육체를 경유하여 모순적인 합일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이라고 한다면, 피와 꽃의 은유가 육신과 영혼을 경유함으로써 피가 꽃이 되고, 또 꽃이 피가 되는 저 시적 도약의 순간이야말로 '온몸의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말해야만 하리라.
김수영이 후대에 던진 저 질문을 오래 간직하며 고민하던 나에게 김남주의 시는 일종의 통쾌한 답안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의 시를 접하면서 시에 대한 인식 자체가 크게 바뀌고야 말았으니까. 진은영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치열하게 정치적인 시'라는 아주 예외적인 순간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인지, 그 단초를 김남주의 시가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남주의 시는 나에게 오늘날 시가 처한 어떤 불가능을 실감하게 만드는 두터운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김남주의 시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뒤이어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 그런데 이걸 지금 어떻게 할 수 있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김남주의 시대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시인은 일종의 혁명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시를 쓰며 그 자체로 감옥인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혁명적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혁명을 꿈꾸는 이가 그 혼자만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의 옥중 시의 상당수가 동료와 이웃을 떠올리고 말을 거는 식이었던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외칠 때, 그는 '우리'의 실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우리'가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 강하게 믿고 있었다. 요는 많은 이들이 혁명의 꿈을 꾸는 시대였기에 그러한 시 또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인이 그와 같은 혁명가적 기질을 가질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제 어느 누구도 작가를 지식인이나 혁명가, 혹은 불온분자 비슷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술은 예술의 자리에 한정되어 생산되며 소비되고 있을 따름이고, 어지간히 도발적이고 문제적인 예술 작품 또한 결국 예술 시장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시인으로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곤란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