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남주 시인
해남군
김남주의 작고 10년을 맞아 출간된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2004)에 게재된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태어나 삼산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 반하여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23세) 전남대 영문과에 진학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그는 1972년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하여 전남대·조선대 및 광주 시내 5개 고등학교에 배포했고, 이듬해 2월 전국적인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고자 역시 친구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고발>을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김남주는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8개월간 수감됐다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전남대 제적), 1974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그해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진혼가>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자퇴 이후 '함성'과 '고발'을 거쳐 '잿더미'와 '진혼가'로 이어진 그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어떤 연유로, 무엇을 위하여 시인이 되고자 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잘 알려진 대로 이후 김남주의 삶과 문학은 자신이 뜻한 바에 따라 농민, 민중, 민족, 혁명과 해방을 향하여 돌진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항상 선봉에 선 그의 삶과 시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저 일련의 단어들이 상징하는 삶을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부당한 현실에 대입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기 때문이다. 수년 전, 우리가 이룩한 바 있는 '촛불혁명'은 민중의 함성과 고발이었고, 진혼가가 울려 퍼지는 잿더미와 같은 현실을 더는 견딜 수 없던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김남주는 여러 글과 시에서 '농민'으로 대변되는 민중이 그들의 논리에 따라 이미 혁명의 주체임을 밝히며 자신의 시를 그들에게 바친다.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혁명적이다. 누가 자기편이고 누가 자기들 적인가를 본능적으로 알아내고야 만다. …(생략)… 내 시는 근본적으로는 이들 농민들에게 바쳐진다. 농민들의 자식이고 동무인 노동자들에게도 바쳐진다. 노동자와 농민과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되어, '나쁜 사람들' 노동의 적 자본가들을 향해 전진하는 혁명전사들에게도 바쳐진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 시의 내용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따뜻한 불, 밥이며 집이며 옷이며 학교며 노래며, 이런 것들을 갖고 싶어하되 그것을 제 뼈와 살의 노동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정이고, 기본적인 그런 것들 갖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을 남의 노동의 댓가를 착취함으로써 독점하려는 자들에 대한 증오이고, 증오의 대상 '나쁜 사람들'을 찾아 무기를 벼르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이다.
- 시집 <사랑의 무기> (창비, 1989) 중에서
내 삶과 시가 무엇에 관한 증오이며 누구에 관한 찬가인지 차분히 살펴본 적 없다. 나의 삶이나 시를 누구에게, 무엇에 바칠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최근 나는 '거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시 한 편에 "그런 적 없는 일. 그것이 우리를 되비춘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옛) 시인의 시가 오늘에 와 우리에게 하는 역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거울 앞에 선 자가 되도록 하는 것.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도록 하고, 꿈꿔본 적 없는 것을 꿈꾸도록 하며, 증오의 대상에 맞서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되도록 하는 것.
우리가 어깨동무 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