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유적으로 남은,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

[중국 동북 3성 여행기 6] 그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

등록 2024.11.01 11:18수정 2024.11.0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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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일 오후 1시 43분]

 발해 수도인 '상경' 정문 옆에 세워진 궁궐의 미니어처 모습
발해 수도인 '상경' 정문 옆에 세워진 궁궐의 미니어처 모습안동립

중국 동북 3성 여행 5일째 목적지는 발해 유적 따라가기다. 학창 시절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세운 나라로 들었다.


역사 탐방에는 나섰지만 막상 발해에 대해 아는 게 부족했다. 그 점은 나뿐만 아니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유적지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야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한국사에 존재했던 국가 중 가장 큰 영토를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후인 698년,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동만주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이다.

국호는 일반적으로 발해로만 알려져 있으나 일본 외교 문서에서는 '고려'라고 불렀다. 서쪽에서 발호하는 돌궐족들을 진압하기 바쁜 당나라는 하는 수 없어 발해를 인정(705년)한 후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의 첫 도읍지 돈화현 동모산

발해의 영토가 가장 크게 확장된 것은 제10대 선왕 무렵이다. 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유역까지 ,남으로는 대동강까지, 동으로는 연해주와 동해까지 차지했으며 북으로는 헤이룽강을 넘어 천여 리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했다.


백두산 관광을 끝낸 일행이 돈화현 동모산을 향해 달리는 동안 도로 주변 산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마을이 있는 곳 주변에는 끝없이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발해 수도인 상경으로 가던 도중에 만난 옥수수 수확 농부들 모습.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부러웠다.
발해 수도인 상경으로 가던 도중에 만난 옥수수 수확 농부들 모습.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부러웠다.오문수

가을걷이가 안 된 옥수수를 동물 사료로 사용한다고 하니 중국이 전과 달리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발해를 세웠다는 동모산성 앞에 세워진 비석 모습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발해를 세웠다는 동모산성 앞에 세워진 비석 모습오문수

한참을 달려 발해가 첫 도읍지로 삼았다는 돈화현 동모산에 도착했다. 옥수수밭 사이로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는 농로를 따라 산 밑자락에 도착하니 두 개의 비석이 서있었다.

하나는 한글로, 또 다른 하나는 한자로 적혀 있었다. 한자로 적힌 '성산자산성' 비석에는 중국 측에서 중점유물로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지막한 야산에 세워진 동모산 산성은 장애물이 없어 방어에 취약한 지형이다. 동모산성까지 올라갈 시간이 없어 되돌아와 돈화시에 있는 발해 유적으로 발길을 돌렸다.

 돈화시에 있는 강동 24 기단석 모습으로 발해 유적이다.
돈화시에 있는 강동 24 기단석 모습으로 발해 유적이다.오문수

 돈화시 중심가에 세워진 발해국왕들의 조각상 모습
돈화시 중심가에 세워진 발해국왕들의 조각상 모습안동립

돈화시에 있는 강동 24개 유적은 건물 기단석이 3줄로 나뉘어 8×11m 크기에 남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발해 유적이라는데, 여기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중국 측의 흔적 지우기는 아닌가 싶어 내심 불편했다.

돈화시 발해광장에는 발해의 역대 왕에 대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발해 국왕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문 다음에는 '제일대고왕대조영(第一代高王大祚榮)'이라는 설명과 함께 갑옷에 투구를 쓴 대조영 조각상이 보였다.

 발해 수도인 상경 인근 광융사 절에 있는 석등으로 보물로 취급된다
발해 수도인 상경 인근 광융사 절에 있는 석등으로 보물로 취급된다오문수

 발해 수도인 상경으로 가던 중 만난 농부 모습으로 아스팔트 도로에 나락을 널어 말리고 있다. 벼를 키우는 농부는 거의 우리 동포들이라고 한다
발해 수도인 상경으로 가던 중 만난 농부 모습으로 아스팔트 도로에 나락을 널어 말리고 있다. 벼를 키우는 농부는 거의 우리 동포들이라고 한다오문수

호텔에서 1박 한 일행이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발해 수도 상경 인근에 있는 '광융사'절이다.

유적 중 가장 눈에 띤 것은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석등으로, 중국에서 보물로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석등은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상륜부의 일반적인 석등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드디어 발해 수도인 '상경'에 도착했다. 비록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상경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안내문에 그려진 발해국 지도와 행정구역을 들여다보니 왜 수도를 '상경'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일행의 리더인 동아지도 대표 안동립씨가 '발해국강역도'를 가리키며 발해국 행정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행의 리더인 동아지도 대표 안동립씨가 '발해국강역도'를 가리키며 발해국 행정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오문수

발해의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큰 도시인 5경이 있고, 전국은 15부로 나뉘었다. 그 밑으로 좀 더 작은 행정구역인 62주가 있었다. 이 중 발해의 중심지는 5경이었고 그 중에서도 수도는 상경이었다.

 목단강과 시가지 모습
목단강과 시가지 모습오문수

잦은 왕권 교체와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약해진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정문 앞에는 발해가 가장 융성할 당시의 각종 궁궐과 건물의 미니어처가 세워져 있었다. 한 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현장에 남은 건 화려한 궁궐을 모사한 미니어처들 뿐이었다.

한국사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발해 지도를 눈여겨보던 중 가을바람이 불어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가을 햇살이라 춥지 않았지만 마음이 싸하다. 갑자기 야은 길재 선생이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수도였던 개경을 돌아보면서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생각났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발해 수도인 '상경'에 있는 궁궐터로 흔적만 남았다
발해 수도인 '상경'에 있는 궁궐터로 흔적만 남았다오문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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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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