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지방기자에겐 '꼬장'도 없다

다른 환경에 놓인 중앙언론과 지방언론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등록 2000.07.13 00:47수정 2000.07.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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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모 지방신문 시청 출입기자 L은 '힘'이 없다. 한번은 내가 청탁 아닌 청탁을 했다. "우리 누이가 오일장에서 고기장사를 하는데 부당하게 맨뒷줄로 밀려나게 됐어"

내가 '청탁'을 하게 된 정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날. 이 지역 오일시장을 관장하는 시청측과 행상대표로 자처한 사람이 나와 얼렁뚱땅 투표를 치러 자리 배정을 하고 말았단다. 이에 따라 10여개 행상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세번째줄로 밀려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누이와 행상들은 밤낮 시위를 했다. 생선을 땅바닥에 쏟아붓고 그 옆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가진 거라곤 단단한 몸뚱이밖에 없는 행상들이 '이것을 팔지 못하면 생계가 위험하다'고 몸으로 외치는 시위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도 오일장에 나와 '우리 엄마 아빠가 돈 못 벌면 우리 학교 못다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에서 피아노소리에 맞춰 동요를 부르고 있을 이 아이들은 당시 부모의 처지에 '스스로' 동참했었다. 이 대립은 12월이 다가도록 끝이 안났다. 부모와 자식들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크리스마스의 밤을 차디찬 노천에서 보냈다.

나의 부탁으로 현장에 몇번 다녀간 그 기자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 역시 한때 나와 같이 기자생활을 했던 나의 동료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 기자가 많이 도와줬다. 그래서 신문에 나왔다. 그러나 비판의 발톱은 많이 감춰져 있었다. 그 기자도 미안해 했다.

시청 캡인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물었다. 선배는 "시청측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알고 있는데 이미 물건너 간 일이야, 나 마감시간이다야, 바쁘다야"하며 전화끊기를 종용했다. 평소 술도 마시고 존경도 하던 선배의 말에 슬그머니 화가 나더니 나중엔 쓴웃음이 일었다.

안되겠다 싶어 친분이 있는 방송사에 또 '청탁'을 했다. 몇번의 재촉끝에 담당 부장이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그림을 담고 멘트를 땄다. 시간상으로 봤을 때 저녁 뉴스감이다. 그런데 행상하는 사람이 몇 명이 TV 앞에 앉아 눈이 빠지게 봤는데 그 기사만 쏙 빠졌다고 했다. 다음날 방송사 편성국에 전화해보니 방송여부도 모르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서민의 목소리'를 담아달라는 '순진한' 요청 끝에 방송은 하루 뒤 아침시간에 잠깐 방송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 선 내가 뜨끔했다. '서민의 주장'과 '행정당국의 착오'를 담아야 옳은 내용인데 이것은 반대로 양비론인지 양시론인지 모를 논법으로 '서민의 이기주의' '행정당국의 원칙'으로 두루뭉실하게 방송되는 바람에 결국 '상인들만 나쁜 놈'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렇다고 중앙방송에 보도되는 것은 어디 쉬운가? 지방 계열방송사나 지방신문사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온전히 '사각지대'로 빠지고 마는 게 현실이다.

정말이지 내가 현장에서 기자들을 불러내지 않고 서울서 전화로 부탁해서 다행이지 정말 몇날 몇일을 밤을 새며 농성하던 그들에게 얼굴을 못들 정도였다. 더욱이 나도, 미운데는 많고 고운데는 하나 없는, 똑 같은 기자 부류였으니 오죽 원성이 많았을까?

이처럼 지방신문 기자들은 왠지 예전과 달리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청탁'을 척척 들어줄 만큼 '끗발'이 세지 않다. 또 기자들 사이에 쓰이는 말로, '조지는'기사도 보기 드물다. 있다면 남이 한대 때릴때 자신도 한대 거드는 격이다. 사실상 기자를 무서워 하는 공무원도 많지 않다. 이쪽에서 "나, 기자요!"하면 '저쪽에선 "우리 처조카가 000부 차장기잔데"라고 은근하게 밝히기 일쑤다. 정말 몇집 건너 기자 아닌 집안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지방 언론사 기자들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비판할 수 없도록 만드는,그 구조적인 매커니즘의 존재를 알았다.

이는 지방 언론사가 최근 90년대 들어 00일보, 00신문, 00타임즈라는 제호를 달고 수도 없이 생겨난데다 MBC, KBS, SBS, 그리고 조선 동아 한겨레 경향 중앙 한국 세계 대한매일, 연합뉴스 등 중앙언론사와 CATV등이 지방으로 확장을 한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언론의 자유'가 폭넓게 신장되기 했는데 언론의 과당경쟁으로 말미암아 '기자의 자유'는 축소됐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행정기관과 단체 등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기사거리'를 받아갈 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함께 지역사회'라는 요인때문에 서민의 입장에서 따끔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못하고 오히려 공무원의 발표문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양비론 내지는 양시론을 내세우는 '뜨뜨미지근'한 기사만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사들은 모두 영세하기 짝이 없다. 한 예로 인구가 60만명인 지역에서 신문사가 3군데 있다고 하면 5인가족으로 계산해 최대 구독 가구수가 4만가구에 불과하다. 이것도 신문을 거의 보지 않는 농촌인구나 TV만을 시청하는 계층까지 모두 포함해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방 언론사 살림이 궁핍하고 덩달아 기자들도 판매부수를 늘리고 광고를 유치해야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특히나 1년에 한두번 있는 '창간 00주년' '00인명록 발간'같은 날을 앞두고서는 공무원에게 일정부수의 구독을 암시(?)해야 하고 동창동문을 찾아 담배값크기의 경축광고라도 하나 받아와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런 순간엔 정론이고 비판이고 기자체면이고 까마득하게 잊는다. 그리고 잊지 않으면 못한다. 한낱 박봉의 월급쟁이로 돌아갈 뿐이다. 그래서 '기자들이 물려받은 재산이 많지 않으면 부인은 십중팔구 선생'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물론 안다. 주위에 언행이 바르고 성숙되지 못한 기자들이 있어 공무원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눈쌀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기자와 공무원간에 다소 마찰이 생기더라도 MBC C기자사건의 경우처럼 구렁이 담넘어가듯 지나가 명확한 판단이 이뤄지지 않은 채 한쪽의 피해자를 낳는다는 것도. 가끔 공무원이 내는 술자리를 피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러나 이런 지방신문사가 처해 있는 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머리와 가슴속에 '정론'을 되새기며 발로 뛰는 기자들이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고개숙인 기자인데 기마저 꺾여선 안된다고 본다. 매년 연초나 연말이면 새로이 들어올 신입기자들의 얼굴이 궁금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모 지방신문을 목표로 공부한다는 소리를 듣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최근 언론의 문제가 다시금 불거져 나오는 통에 주어진 환경이 다른 중앙일간지 기자와 지방일간지 기자를 똑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금 지방언론사 기자는 대부분이'고개숙인 기자'다.

10여년의 경력이 있어도 신입기자인'MBC C기자'와 같은 '꼬장'도 부릴 줄 모른다. 난, 오히려 내친구 L기자가 '꼬장'을 부렸으면 좋겠다. 아무도 말릴 줄 모르는 '기자정신'으로 똘똘뭉친 그런 꼬장을 부려줬으면 속시원하겠다. 그러면 지난번 오일장 사건때 웃지 못했던 웃음을 지금이라도 손바닥치며 '하하하'웃을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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