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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집안의 짐 거의 대부분을 다른 곳에 맡겼다. 이사 과정이 순조롭지 못해서 이 집은 미리 비워줘야 하고 새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도 못해서 그 동안 떠돌이 신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롱, 텔레비전, 세탁기, 전자렌지, 침대 등 짐들이 실려나가자 크지도 않은 집이 대궐만해진 것 같고 메아리까지 생겼다. 갈아입을 옷이나 당분간 먹을 수 있는 그릇같은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없어졌다.
나는 짐들이 하나씩 밖으로 나갈 때마다 '저게 없으면 안되는데'를 되뇌었다. 내가 가장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 세탁기 없이 손빨래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셋인 데다가 특히 개구쟁이인 막내가 옷을 많이 버리는 편이라 거의 하루에 한번씩 세탁기가 가득차곤 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빨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가 지나지도 않아서 빨래가 커다란 바구니에 가득 모였다.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하는데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그런데 하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땀흘리며 가사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빨래를 너는데 왜 그리 뿌듯한 기분이 드는지 하나 하나 들어서 살펴보고 흐뭇해 하면서 널었다. 유난히 깨끗해 보이는 것이 기분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기계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겠어? 괜히 지금껏 잘 써온 세탁기를 은근히 얕보기도 하였다.
빨래를 널고 거실에 오니 이상하게 조용하였다. 생각해보니 거의 항상 켜져 있다시피한 텔레비전이 없어서였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심심해서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심심하기는커녕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집안 전체가 고요해진 것 같았다. 딱히 보아야 할 프로그램도 없으면서 켜 놓으면 눈이 가고 또 쉽사리 꺼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 텔레비전이었다. 밤에는 거의 텔레비전을 꺼 놓은 적이 없어서 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귀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소음들이 사라지자 정말 평화로웠다. 어둠도 더 다정하게 다가서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아이들도 조용히 책을 찾아 읽었다. 언니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좋아하는 연속극도 못 보겠다며 전화로 약을 올렸지만, 나는 텔레비전이 있어서 시끄러울 언니가 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텔레비전으로 인해 소비한 시간이나 여유들이 아까웠다. 아예 이 참에 텔레비전을 없애버릴지 심각하게 고려해 보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데우려다 보니 전자렌지가 없었다. 전자렌지가 없으면 이 찬 걸 어떻게 먹나 걱정하다가 문명이란 것이 사람을 참 어리석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주 옛날에는 불이 없을 때도 있었는데 이젠 가스렌지까지 있고, 가스렌지에 데우기가 번거로워서 전자렌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정 데우고 싶으면 가스렌지에 데우든가 귀찮으면 차가운 채로 먹으면 그만인데 전자렌지가 없어서 음식 먹기를 망설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침대나 장롱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생각도 안든다. 오히려 집안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좋다. 짐들이 있을 때는 모두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것 같았는데 막상 없어지고 나니 필요하다는 생각이 거의 안 든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살면서 꼭 지녀야 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리에 나서면 핸드폰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핸드폰이 없다. 가지지 못한 것도 아니고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냥 없어도 불편하지 않아서 가질 생각을 못하는 것 뿐이다.
요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학교에서나 유치원에서까지 집 전화번호와 함께 어머니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오라고 한다. 핸드폰이 없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있다. 어찌보면 내가 문명에서 비껴나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내게 핸드폰이 없다는 것이 참 좋다.
나 혼자 외출을 할 때면 누가 나를 불러들이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온전히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서다. 그럴 때 나는 내 시간들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충만감이 들곤 한다.
핸드폰만이 아니라 나를 편리하게 해줬던 물건들이 사라진 것도 그런 느낌이다. 그 물건들의 빈 자리를 내가 채우게 되고 그만큼 내가 더 가득해지는 것 같다.
지금 집에 남아 있는 가재도구들은 많지 않지만 여기서도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을 고르라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온갖 물건들에 너무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멀쩡한 몸을 '편리'라는 인큐베이터에 집어넣고 그 선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워하며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큐베이터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지 염려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나도 그 인큐베이터에 갇혀 있었고 지금도 많은 부분이 그렇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오지의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을 접하곤 했는데 가재도구나 자신의 몸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들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이 사는 그들을 염려와 우월감이 섞인 눈으로 보았다. 아마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우월감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지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힘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메꿔나가는 일이 얼마나 뿌듯한지 아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들의 삶이 부러워진다. 그리고 무심히 편안함에 물들어 있던 날들을 돌아보게 된다. 세탁기가 고장나면 그것을 고칠 때까지 빨래를 쌓아두고 기다리게 되고,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쫓겨 외출에서 바쁘게 돌아올 때도 많았다.
힘들면 한번씩 써야지 하고 샀던 세탁기와 필요한 것만 봐야지 하고 샀던 텔레비전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것들에 너무 많이 의지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물건들을 거느리고 산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얽매여 살았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그 물건들의 빈 공간만큼 내 마음이 충만해진 것 같고, 내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선 것 같다.
이삿짐들이 빠져나간 요 며칠 나는 정말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편리를 가장한 속박에서 풀려나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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