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는 내 업이자, 내 팔자"

작곡자 윤민석이 말하는 '애국의 길', 그 후 12년

등록 2002.07.16 23:03수정 2002.07.1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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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윤민석

윤민석 ⓒ 민족21 유수

'전대협 진군가’‘서울에서 평양까지’그리고‘애국의 길’.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하는 노래들. 그리고 2002년 현재, '퍼킹유에스에이(Fucking U.S.A)’ ‘누구라고 말하진 않겠어’ ‘또 다시 너를 묻으며’ 등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들을 토해내고 있는 사람, 윤민석(현 ‘송앤라이프’ 대표).

노래로 말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어서일까. 처음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을 때 그는 상당히 어색해했다. 게다가 그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윤민석이 말하는 애국이란 무엇인가’였다. 다시 말해 ‘애국의 길’ 그 후 12년의 이야기인 셈인데 인터뷰 취지를 듣자마자 그는 당황해하기까지 했다.

“거, 상당히 어려운 주제인데요. 하, 그러고 보니 벌써 12년인가….”
잠깐 혼자 감회에 잠긴 듯 침묵이 이어지더니 곧 그는 처음 ‘애국의 길’을 만들던 시기로 돌아가 있었다.


노래로 쓴 결의서

“저는 학생운동을 늦게 시작했어요. 제가 84학번인데 우리 때만 해도 운동권은 비합법조직이었고 지하에서 ‘선’을 통해 연결되는 그런 것이었죠. 저는 3학년까지는 소위 말하는 일반학우였어요. 그것도 상당히 운동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일반학우였죠. 그러다가…, 어쨌든 시대를 비껴가지는 못했어요. 점점 고민이 깊어지면서 뒤늦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3학년 마치고 휴학을 하면서 그 당시에는 없던 노래패를 같이 만들면서 운동이라는 것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하잖아요.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운동에 복무할 수 있는 부분은 결국 ‘딴따라’ 기능뿐이었어요. 하지만 똑같은 칼도 엄마가 들고 있는 것과 강도가 들고 있는 것이 다르듯이 똑같은 음악도 그 기능을 보자면 그냥 소위 말하는 딴따라가 구사하는 것과 투사가 구사하는 것은 다르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물론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긴 하지만, 또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 않은 바람이지만 그 당시에 나는 전사라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투사라는 말도 듣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당시 우리에게 가장 큰 화두였던 해방이라는 단어나 자주·민주·통일이라는 단어,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단어들에 나름대로 부합되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런 가운데서 만들어진 것이 ‘애국의 길’이었어요. 저는 눈물이 많은 편이라 노래를 만들면서 가끔 울기도 하는데, ‘애국의 길’을 만들 때도 그랬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이 노래는 길지 않은 노래라는 형식 속에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그 시절 노랫말로 하자면 반미구국투쟁과 조국통일투쟁에 대한 나름의 경외심을 표현한 것이었죠. 그렇게 살고자 하는 나의 결의를 담은 것, 다시 말해 노래로 쓴 결의서였어요.”

과격하고 낯설게 들릴 수도 있는 ‘반미구국투쟁’ ‘조국통일투쟁’이라는 말들. 당시 그에게 이런 말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그에게는? 한번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노랫가락처럼 계속 이어졌다.


역사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문제, 여성문제, 노동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있게 마련이라고 봐요. 그러면 과연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저는 문제해결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느끼는 부당함들, 지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각종 게이트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 하는 패배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사고들,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사회가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견지하면서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선, 합의할 수 있는 선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공동의 선이란 군부독재 시절처럼 획일적인, 위에서 강요하고 내려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공동의 삶의 범주같은 것이에요. 인간성에 근거한 이러한 공동의 선이 합의되거나 공유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봐요.

여성 문제만 봐도 그래요. 여성의 취직, 육아문제는 사회적 제도의 문제이지, 여성 개인이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개인의 능력문제로 떨어지거든요. 그러니 여성들이 이 문제로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거구요. 박정희 기념관 문제도 몇몇 인사들이 농성하고 싸우고 하는 것 이외에 국민들이 과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건데요. 박정희나 전두환에 대해 역사적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그놈이 개인적으로는 재능 있는, 소위 난 놈 아니냐 이런 판단들이 있단 말예요.

이렇게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에서는 다른 제반 문제들이 해결될 수가 없어요. 그럼 이런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저는 친일파 숙청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우리 아버지 세대를 참 미워했거든요. 극도의 가족 이기주의와 그러면서도 자기 딸 같은 애들을 술집 가서 주무를 수 있는 그런 이중성을 극도로 증오했었어요. 그런데 그 세대가 자라온 배경을 이해하려 드니까 제 증오가 그들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시대 상황, 현장에 대한 것이었더라구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해방을 맞았어요. 그런데 내 주변의 누군가가 가족이 독립투사여서 일제 때 엄청 고생했단 말예요. 그래서 해방되니까 아, 이제 이 사람은 잘 살겠구나, 했더니 친일파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오히려 이 집은 동네 들어오지도 못하고. 이런 꼴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고 또 전쟁을 겪으면서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들어오는 격동을 겪으면서 아, 믿을 건 내 새끼밖에 없다, 내 새끼는 내가 지켜야 한다 이런 극도의 가족이기주의가 단단하게 박힐 수밖에 없는 그런 세월을 겪어왔다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친일파 숙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과정에는 또 분단 문제가 있었지요.

저는 그래서 우리 남쪽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분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거꾸로 나는 통일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거고, 통일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회창과 미국이라는 부정적 요소가 있으니까 당연히 이회창과 미국에 대해 반대할 수밖에 없는 거고요. 분단문제는 근현대사를 통틀어 모든 문제의 총체적인 악이고 근원이예요. 분단이 되어야 할 놈은 패전국인 일본이었어야 하는데 우리가 찢어지고, 그런 가운데서 뒤틀려온 그것. 저는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구조적인 문제가 아주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에 이 두터운 층을 뚫고 희망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 수도 있겠지요.”

이회창도 애국자다?

갑자기 짓궂은 질문이 생각나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이회창도 자신은 애국자라고 생각할텐데요?”
“그렇겠지요”하며 그는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너무나도 쓴맛 나는 것이었다.

“역사적 판단을 내리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역사학계나 교육계에도 친일파나 그 후손들이 진을 치고 있었잖아요. 저 역시 학교 다닐 때 ‘말당’(末堂) 서정주의 시를 암송하면서 정말 천재적인 시인이구나 생각하고 컸고, 윤동주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생체실험으로 죽어갔다는 사실도 대학 와서야 알았고.

이런 상황이니 그들도 자기가 애국자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그들이 얘기하는 애국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얘기하는 나라란 분단된 남쪽만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어요. 적어도 분단 문제에서만큼은 말예요. 저는 오히려 그네들에게 거꾸로 묻고 싶어요. ‘너희들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나라라는 게 도대체 뭔가?’ 저는 그들이 분단 구조의 고착화, 그 안에서 자기들의 기득권과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애국’이라는 말을 끌어다 붙이는 것뿐이라고 봐요.”

‘나라를 사랑한다’라는 단어의 뜻만 가지고 보면 이회창이나 윤민석이나 다를 게 없겠지만 결국 어떤 나라를, 무엇을 위해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길과 역사적 판단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일까.

“제 딸이 5개월 됐는데요, 만약 내 사랑하는 딸내미가 감기에 걸리면 내가 딸을 사랑하는 만큼 감기에 대해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감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온갖 짓거리를 다 할 거라고요. 그걸 좀더 외연을 넓혀서 본다면 내 나라를 질곡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만들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살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에 대해서는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요인들 중에 가장 큰 것이 분단상황, 그리고 그 분단을 야기한 미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운동의 가장 핵심은 통일을 이야기하고 통일을 위해서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되는 미국을 상대로 적대적으로 싸워나가는 것일 뿐이지요.”

민중가요의 길에 들어선 지 15년, 그리고 ‘애국의 길’이 나온 지도 12년이 지났다. 세월도 많이 변했고, 사람들도, 사회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감성의 코드가 달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당시의 젊은 세대나 지금의 젊은 세대나 그리고 이전의 노래패 윤민석이나 지금의 ‘송앤라이프’ 대표 윤민석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문화사업’이라는 말 아래 영화 속에 어떤 장면을 어디서 어떻게 삽입해야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지 철저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 그만큼 투철한 자세로 감성적으로 호소하고 함께 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분하고 있는 쇼트트랙과 김동성 이야기를 하면서 부시와 반미와 노근리라는 역사적인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끌어나가려고 노력했고 예상 외로 엄청난 호응을 끌어모았다는 ‘Fucking U.S.A’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기까지 그를 끌어온 힘, 지금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은 그 옛날의 ‘애국의 길’이다.

“만약 누가 나한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버텨온 힘이 뭐냐, 묻는다면 저는 고놈의 ‘애국의 길’이라고 얘기할 거예요. 내가 반미구국투쟁 만세라고 얘기했고, 조국통일투쟁만세라고 얘기했던 나의 결의서. 감방에 있을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로부터 ‘나는 이 노래를 듣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 편지를 받았을 때 정말 부담스러웠던 적도 많았지요. 민중가요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떼고 싶었던 적도 많았고요.

1995년 출소한 다음에도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윤민석, 내 본명도 아니니까 본명 쓰면서 이래저래 아는 가수들 노래 주고 뽀대나는 작곡가로 살고 싶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저라고 5개월 된 딸아이 분유 고르면서 2∼3천원 더 비싼 분유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싶고, 주머니 속 천 원짜리 몇 장 만지작거리면서 비참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없겠어요? 그런데 이놈의 민중가요라는 게, 그 운동이라는 게 그 세월 동안에 내 속에서 혼합이 아니라 화학반응을 일으켜 버려가지고 이걸 떼내려면 내 살점이 다 떨어져나갈 지경이더군요.

과다출혈로 죽어버릴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게 내 업이다, 내 팔자다. 그렇다면 기왕에 할 거라면 잘하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적어도 내 노래 때문에 ‘신세 조진’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그 사람들한테 얼마나 큰 위로나 힘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가 나를 용납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길을 가는 게 힘들고 외롭지만 적어도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보다는 쉽다, 그래서 가는 거예요. 민중가요는 상품이 아니라 내가 삶으로 담보해야 하는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 (국제민주연대 발행 '사람이사람에게' 2002년 5,6월호 게재)

덧붙이는 글 (국제민주연대 발행 '사람이사람에게' 2002년 5,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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