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맞은 시골장, 고향 냄새 물씬

[추석 특집] 한가위 앞둔 신탄진 오일장 기행

등록 2002.09.18 23:00수정 2002.09.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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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임마, 기자님이 너 잡으러 왔다! 으허허"
"야 임마, 기자님이 너 잡으러 왔다! 으허허"박주미
"우리 때는 맛난 음식 먹을 생각에 일년 내내 명절만 기다렸지. 설 지나면 추석 기다리고, 추석 지나면 설 기다리고..."


잘생긴 햇밤
잘생긴 햇밤박주미
신탄진 장터 국밥집에 국밥 한 그릇 먹으러 들어갔다가 결국 소주도 한 잔 하고 말았단다.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한 세 노인이 별로 오가는 말도 없이 그저 웃어댄다. 주름 깊게 패인 서로의 늙은 보습을 보면서도 '이 눔아', '저 눔아' 소리가 자연스럽다.

세 노인은 모두 신탄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자랐지만, 지금은 서울, 평택, 대전으로 흩어져 산단다. 명절 맞아 근 3년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나니 서로 얼굴만 봐도 좋은가 보다. 세 노인 너털웃음만큼이나 푸근한 고향 내음이 추석 대목을 만난 신탄진 5일장에 그득하다.

"만원에 네 개 줘유"
"만원에 네 개 줘유"박주미
명절 장이라 그런지, 사과며 배, 풋대추가 제법 잘 생긴 놈들만 모였다. 흠이라면 수해때문에 값이 만만치 않다는 것. 어지간한 사과 한 덩이에 2천원, 3천원하고, 무도 한 개에 2천원씩이다.

"조상님 맛난 거 올려 드릴라구 장보러 왔구만, 비싸서 몇 가지 사지두 못 허겄네유."

차례 상에 올릴 음식 거리 장만하러 신탄진 장에 나온 변할머니(61)가 혀를 내두른다. 그렇다고 조상님 조반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그 중 잘난 놈으로 골라 비닐 봉지에 담으며 흥정을 붙인다.


"이 눔, (만원에) 네 개 줘."
"어이구, 그르키는 안돼유."
"네 개 줘유."
"안 돼유."
"거참... 이것만 받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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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원짜리 사과 네 개에 1만원 던져주고 뒤뚱뒤뚱 자리를 뜨니, 변 할머니 승(勝)이다.


신탄진 장서 20년 장사했다는 자칭 '귀여운 아줌마'
신탄진 장서 20년 장사했다는 자칭 '귀여운 아줌마'박주미
신탄진 5일장은 대전서 유성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이다. 장 서는 날이면 파는 사람, 사는 사람들로 으레 북적이기는 하지만, 명절 장은 규모도 더 커지고 시내 사람들까지 몰려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다.

평소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에서 장을 본다는 이씨(34)도 "비 많이 와서 채소 값, 과일 값 오른다더니, 정말 너무 비싸더라"며 "깎아서라도 좀 싸게 사려고 신탄진으로 왔는데 아무래도 백화점보다는 나은 것 같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손님 부르는 소리, 여기저기 아이들 징징대는 소리에 그야말로 북새통인 시장 한복판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전단지 묶음을 들고 뻘쭘히 서 있다. 아까 접은 전단지 한 장을 내내 쥐고만 있기에 다가갔다.

"이거 하나만 받어가유"
"이거 하나만 받어가유"박주미
"명절인디 모아 놓은 돈이 없어서 손주들 오믄 용돈이라도 줄라고 이러구 있지."

명절에 놀러 올 손주 녀석들에게 용돈 좀 많이 쥐어주고 싶은 마음에 김할머니(67)는 난생처음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받아가는 사람이 몇 없어 혹시나 일당을 못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지만, 손주들 생각에 고되지는 않다며 성근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신탄진 사거리에 원래는 굴다리가 있었다. 굴다리 아래가 장사꾼들에게는 명당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굴다리를 폐쇄하고 철도공사를 하는 바람에 좁다랗게 임시 통로가 생겼다. 여지없이 그 통로도 시장통이 되었는데, 명절장에 그 공간이 여유 있을 리 만무하다.

그 길 따라 비비적대며 이동하는데 어쩐지 행렬이 멈춰버렸다.

"왜 이런댜?" "왜 안 가는 겨?"

웅성거리는 사람들 너머로 간신히 내다보니 허리 구부정한 노부부가 종이 박스를 한 짐 실은 '리어카'를 끌고 온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앞동네, 뒷동네로 구분되는 지역이라서 그 길 말고는 넘어올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 눈총에 "미안해유! 미안해유!"라고 외치며 버둥버둥 지나오는 그 양반들도 발 묶인 이들만큼이나 답답했을 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시방 추석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두 노인네 밥이라도 먹고 살라믄 난리통이라도 일해야 할 처지여."

의지할 자식이 없어 종이 박스 주워 날라 근근히 먹고산다는 노부부는 명절 분위기에 무심한 척하면서도 서운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박주미
추석을 맞는 신탄진장에는 별별 사람들의 오만가지 표정이 담겨 있었다. 짭짤한 대목벌이에 신이 난 시골 장사꾼들의 순박한 웃음과 피붙이들과 함께 할 기쁨으로 명절 음식 거리 장보러 나온 아낙네들의 정성, 그리고 명절이라서 더욱 쓸쓸할 어떤 이들. 제 각기 다른 표정이지만 어쨌든 민족 대 명절 추석을 앞 둔 시골 장터 공기는 확실히 여느 때와 다르긴 다르다.

핏줄 찾아 고향으로 향하는 민족 대이동 풍경에 외국인들도 놀랐다는 우리네 명절. 정겨운 살냄새 풍기며 북적북적 붐비는 시골 장터로부터 우리 명절 추석은 가까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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