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 '색깔론' 어찌하오리까

서청원 대표의 좌파발언을 접하고

등록 2003.01.09 09:17수정 2003.01.0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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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에 가족,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오붓하게 세배도 드리고 덕담도 나누며 계미년 한 해를 양처럼 순하고 평화롭게 만들자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던 중 어르신 한 분이 지난 대선 얘기를 꺼내면서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간 논쟁은 점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집안인지라 부모에게 대드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설교를 강요당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떻게 노무현이 될 수가 있어?"
"사람들 다 미쳤어."

그러면서 화살이 30대 초반인 나와 형에게 꽂혔다. 나머지 또래의 친척들은 대부분 말 잘 듣는, 그래서 부모의 영향을 그대로 전수 받은(?) 이들이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이번에 누구 찍었니?"

나와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못했다.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라고? 말하진 못하고 정체불명의 웃음만 지어보였다.

"웃는 거 보니까 노무현 찍었구나?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허참...왜 노무현을 찍었니? 아주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이 대통령 될 자격이나 갖췄다고 보니?"

분노한 기성세대의 호통에 땀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일 테니까 묻어두자고 했는데 다음부터의 대화들이 가관이었다.


"이번 노정권 인수위 봐. 완전 좌파들만 모아놨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나라꼴이 완전 좌파, 빨간색으로 물들 거라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참담했다. 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저 골 깊은 기성세대들의 불신이 몇 사람의 보수논객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깨달으니 아직 이 나라의 세대통합은 멀었다는, 제법 큼직한 나라걱정까지 하게 됐다.


사실 위의 정초 후일담은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만 있었는데,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의 좌파정권 발언을 듣고 꺼내게 된 것이다. 주변에서는 한나라당이 여전히 구태한 색깔론으로 공격하려 드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는 의견이 오간다. 반민주, 친일, 5공 잔재, 광주학살 등 자신들의 치명적인 결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여전히 좌파 운운하며 남 헐뜯기에 바쁜 한나라당이 어떻게 지난 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압승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더 심각한 것은 서청원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골 깊은 보수파들은 각각의 정권에 대해 좌파니 중도우파니, 이런 색깔과 등급을 매겨놓는 게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업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좌파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과 행정이 급진적이고 불안할 것이란 주입. 이런 주입이 이제 더 이상 20-30 세대들에게 들어먹히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를까. 겪어보고도 모른다면 약이 없다. 북핵문제, 소파개정 등 굵직한 현안에 대한 야당다운 멋진 해법을 내놓는 것은 고사하고 기껏 당직자회의에서 쏟아낸다는 말이 정권에 대한 색깔 분류작업인가.

서 대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성세대들의 소리 없는 외침처럼 들려 안타깝다. 여기저기 모처에서 내 친척, 내 친구의 아버지가 좌파정권이 들어섰다며 이 나라가 끝장난 것처럼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상심하고 있어도 정치인은 조금 다르게 처신해야 할진대, 어찌 한술 더 떠서 새로 출범할 정권의 불신작업에 전념하는 야당 대표를 보니 또한 안타깝다.

레드콤플렉스는 폐기되고 있는데 '레드'만 부유한다. 더 이상 색깔론에 멍든 나라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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