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적 외교란 무엇인가?

윤영관 장관의 경질에 부쳐

등록 2004.01.16 17:35수정 2004.01.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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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중국의 고사가 있다. 그 유래는 <삼국지연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용은 촉(蜀) 나라의 제갈 량(諸葛亮)이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자기의 명령·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다가 패한 부장(部將) 마속을, 그 전날의 공과 두터운 친분에도 불구하고 울며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좀 더 소설 속 깊은 곳까지 살펴보자. 가정(街亭)이란 지형은 사방으로 길이 연결되어 전투에 동원될 식량과 촉군의 후원병들이 들어오고 나아가는 중요한 기착점이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에 있어 잃어서는 안될 중요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그토록 믿었던 부하가 임의적인 판단으로 그 중요 지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북벌의 꿈을 접고 촉으로 후퇴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제갈량은 가정을 방어할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속은 자신의 오만함과 얄팍한 지식만을 믿고 자신의 작전을 구사하다가 그리된 것이었다. 패배로 인해 가정(街亭)이란 한 지역만상실한 것이 아니라 촉나라 전군사의 후퇴를 가져왔으니 그 책임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어제 윤영관 외교부 장관의 사임을 보면서 이 고사성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서의 최고 수장이 낙마한 불씨는 해당 부서에서 불거나온 갖가지 추문과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대통령에 대한 통치철학에 대한 험담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윤영관 장관 본인이 주창해 온 '윤영관식 외교 잣대' '윤영관식 자주외교관'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이번 윤장관의 사임을 놓고 연일 '연미원북(聯美援北) 결일부북(結日扶北) 협중공영(協中共榮)해야한다(미국, 일본, 중국과 같이 연합하여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도모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어리석고 자조적인 깃발 아래 평택 이북에 미군이 한명도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덧붙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또한 "한미동맹론을 견지하는 윤 장관을 '항명'이라는 굴레를 씌워 문책경질하고서는 '자주외교론'을 들고 나와 합리화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반미주의, 혐미(嫌美)주의에 입각해 한미동맹관계를 해체하겠다는 것이 청와대의 자주외교인가"라며 "외교장관을 비롯한 북미라인을 통째로 '숭미주의'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 숙청해서 초래될 외교적 파장과 국익손상은 개의치 않고 있다"며 "아예 외교통상부를 '반미외교부'로 간판을 바꿔달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더욱 더 가관이다. 미국 월가 보수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지는 "윤영관 장관의 경질 사태가 확대될 경우 미국 정부가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윤 장관의 경질보다 더 나쁜 소식은 추가 경질을 시사한 것이다. 이번 사태가 군사동맹까지 해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한미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윤 장관 경질과 같은 사태가 계속될 경우 미국의 인내심을 빠르게 바닥날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하고 있다.

미국 서부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로스엔젤레스타임스>는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미 관계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국내 정치 갈등으로 사임했으며 이로 인해 한미관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이번 '이라크 파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은 한미 동맹 관계를 고려한 조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반도의 자주적 외교정책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하더라도 사사로이 국정에 태클을 거는 그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친미(親美)주의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관료들로 외교통상부를 채워달란 말인가? 그들은 모르고 있다. 한국인들 가슴속에 국정 간섭의 치욕이 얼마나 뼈저리게 새겨져있는가를.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일본의 독도 망언', '일본의 개헌 움직임'들은 국민들에게 한반도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의심케 하고 있다. 언제까지 주변국들의 치고 빠지기식 역사 왜곡과 한반도 건드리기에 국민들은 분노와 절규만 해야 하는가?

모름지기 국가라는 존재는 동맹이나 국제간 연합, 협력등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자국의 이익은 누구도 그 범위와 한계에 대해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국민들 대다수가 미국이 과연 한국의 동맹국인가라는 점에 물음표를 달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과 미국 정부의 도적성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국내적으로는 '여중생 장갑차 치사사건'과 잇따른 미군범죄사건들을 계기로 부당한 SOFA협정으로 발기발기 찢겨진 한국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더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자주적 외교란 무엇일까? 힘있는 국가 옆에 서서, 마냥 비위만 맞추고 있는 것이 자주적 외교인가? 자기가 속한 국가와 국민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한반도는 국제정치의 공백 상태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만큼 그런 현실 속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두리뭉실한 논리를 앞세워 "정부 일부와 국민, 여론주도층이 그런 인식을 별로 갖지 못한 것 같다"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뱉는 윤 장관을 우리가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 누구도 윤 장관에게 미국과 기타 국가들과 적대시하라고 한 적은 없다. 다만 협력을 해나감에 있어 상대국의 주장과 이익이 외교통상부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통상부라면 최소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협상을 위해 보낸 사원이 상대방의 고압적인 태도에 눌려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맺고 와서는 한다는 말이 "현재 회사가 처한 상황으론 어쩔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사장과 회사의 대다수 직원들이 앞으로 상대방 사에서의 이익이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협상부터는 자사의 상품에 비례하는 값어치를 얻어내겠다는 방침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윤 장관에게 있어서 한국이란 국가 상품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내세울 것 없다고 생각됐다면 오히려 지금의 경질은 너무 늦은 감이 있어보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 그렇게 쏟아부었던 경비와 시간들로 이뤄놓은 대북관계와 대미외교관계는 한 장관의 주관적인 자주외교적 관점에 의해 한순간 물거품이 되가는 듯하다. 필자는 그런 점이 너무나 아쉽고, 그런 점을 간과한 윤 장관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장단을 맞춰 주는 덜떨어진 정치 집단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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