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산의 가을을 전합니다

등록 2004.09.25 13:05수정 2004.09.26 15:57
0
원고료로 응원
해발고도가 높은 이곳, 콜로라도의 가을은 다른 지방보다 일찍 시작됩니다. 9월말이 되면 단풍이 절정에 이릅니다. 지난 주말까지 수영장에서 늦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주 연이틀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제, 언제 첫눈이 내릴지 모릅니다. 올해도 로키산의 단풍을 못 보고 가을이 가 버릴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런데 비가 개인 목요일 아침, 창문을 여니 햇살이 눈부십니다.


단풍구경을 작정하고, 지난 노동절(9월 6일)에 쉬지 않고 휴가를 하루 벌어두었던 남편은 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은 감기기운이 있어 망설이는 저와 아이를 채근해서 차에 태웠습니다. 차에 탄 지 얼마 안 되어 밖에 나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가든오브가즈와 파잌스피크

가든오브가즈와 파잌스피크 ⓒ 정동순

우리가 사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서쪽에는 로키산의 준봉인 파익스 피크(Pikes Peak)가 있습니다. 그 봉우리엔 벌써 흰눈이 쌓여 그 형상이 날개를 펼친 흰머리독수리 같습니다. 스페인어에서 온 붉은색이라는 뜻의 콜로라도답게 붉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을 지나 산골짜기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갑니다.

삼십 분쯤 올라가면 거기에는 로키산맥을 형성하는 봉우리들과 넓은 분지가 있습니다. 이곳에 형성된 분지는 해발고도가 8천 피트(약 2400미터)가 넘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그곳에는 광활한 목초지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블랙앵거스라고 불리는 검은 소떼나 버팔로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롭게 방목되는 가축들 중에 당연 눈길을 끄는 것은 선량한 눈에 단아한 근육과 윤이 나는 말갈기를 휘날리는 밤색 말들입니다. 말발굽 소리를 듣지 않아도 기분이 상쾌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땅에 낮게 엎드린 작은 들국화는 진한 보랏빛 향기를 뭉텅뭉텅 내줍니다. 너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향기를 내준 적이 있는가 묻는 것 같습니다. 바위틈에서 나와 호기심 가득 어린 얼굴로 앞발을 들고 우리를 살피는 아기 다람쥐도 참으로 앙증맞습니다.


a 온 산을 물들이는 단풍

온 산을 물들이는 단풍 ⓒ 정동순


a 백양나무

백양나무 ⓒ 정동순

우리가 가는 곳은 캐나다부터 수천 리를 이어져온 로키산, 그 중에서도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개된 거니슨 카운티(Gunnison County)입니다. 이곳의 숲은 주로 전나무나 소나무 같은 추위에도 잘 견디는 침엽수림인데, 산 아래쪽이나 도로 주변에는 낙엽수인 백양나무(aspen)가 군락을 이루어 단풍이 듭니다.

백양나무는 흔히들 사시나무라고도 하는데, 나무밑동이 미녀의 다리처럼 희고 매끈합니다. 무리지어 늘어선 나무들은 바람이 몇 점 불기라도 하면 노란 잎들이 일제히 일어나 햇살 아래 현란한 춤을 춥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짙푸른 전나무숲과 대비되는 노란 색들의 반란입니다. 코끝이 찡해옴을 느낍니다.


로키산에서 나는 물은 같은 봉우리에서 솟아 나오더라도 어떤 물줄기는 태평양으로 흐르고 어떤 물줄기는 대서양으로 흐릅니다.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가는 아칸사강은 이곳 로키산이 발원지입니다. 캔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사 주를 지나 거대한 미시시피강에 합류됩니다.

a Fly Fishing

Fly Fishing ⓒ 정동순

가을 강가에서 플라이 피싱(fly fishing)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플라이 피싱은 물고기가 좋아하는 갖가지 곤충 모양을 만들어 낚싯줄에 달고 공중으로 두어 번 낚싯줄을 날려 보내듯이 흔들어 던집니다. 물고기는 먹이가 날아오는 줄 알고 그것을 덥석 물어 버립니다.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에서 가을다운 정취가 물씬 느껴집니다.

우리는 또 다른 골짜기로 차를 몰았습니다. 평일이라 단풍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드물었지만 마른 산에 불을 지피듯이 타는 단풍이 있는 곳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갓길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디지틀 카메라의 용량을 꽉 채우지 않고는 계곡을 빠져 나가기 어려울 만큼 노란 단풍은 매혹적입니다.

a 오매 단풍들었네

오매 단풍들었네 ⓒ 정동순

생활을 하다보면 내게 득이 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실이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자연 앞에 서면 손해를 보는 이 없이 모두가 한보따리씩의 풍성함을 나누어 갑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틀림없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만이 주는 큰 즐거움입니다.

로키산의 가을에 취해 산자락에서 날이 저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등뒤로 번지는 노을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 황홀함에 기어이 눈물 한줄기가 번집니다.

a 불타는 노을

불타는 노을 ⓒ 정동순

아칸사강을 따라 꼬불꼬불한 밤길을 더듬어 옵니다. 밤공기는 차고 맑으며 별들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깜깜한 산골짜기, 추석을 앞두고 그리움을 점점 채워가는 달이 높이 떠올랐습니다.

머리 위로 밝은 빛 하나가 쏜살같이 지나가다, 갑자기 사라집니다. 별똥별이었습니다. 저는 재빨리 소원 하나를 빌었습니다. 몸은 고단했지만, 로키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온 가을날이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