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은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없을까

[김보일 칼럼 42] 알랭 드 보통의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등록 2005.06.29 16:19수정 2005.06.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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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 생각의 나무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라는 것처럼 허황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어떤 요인들이 관여하는지도 확정된 바가 없고 설령 그 요인들을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영향력을 계량화할 수도 없다. 암스테르담처럼 습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어두운 성격을 만들어 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 얼마든지 예외적인 성격은 있기 마련이고, 그 예외를 만들어내는 요인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의 가계(家系)가 한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는다는 듯 대개의 전기(傳記)는 한 사람의 족보를 캐는 데 수많은 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한 사람의 성격을 무쪽 가르듯 구분해 낸다는 것은 프로이드 할아버지가 살아온다 해도 요령부득이다. 한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어떤 것인지조차 분명하게 알 수가 없고, 설령 그 변수들을 모두 조사했다고 해도 변수와 변수끼리 맞부딪쳐 일으키는 불꽃의 밝기를 계산하는 데만도 몇 만대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령 오늘 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비염이 있으며 최고 혈압이 100이며, 호박잎 삶은 것을 된장에 찍어먹기를 좋아하며, 왼쪽 셋째 발가락에 약간의 무좀이 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한 인간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환경의 산물일진대, 한 인간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결국 판단자의 섣부른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첫인상을 보고 어떤 사람의 본질을 간파했다는 것도 필경은 오만한 자의 떠벌림에 그치기가 십상이다.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인식은 따지고 보면 타인을 자아화하려는 포섭의 욕망에 지나지 않든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할 뿐이다. 화석화된 박제가 아닌 이상 대상은 호락호락 내 인식의 범주에 걸려들지 않는다. 언제든 우리의 믿음을 비웃으며 뒤통수를 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경솔한 자신의 태도를 탓하기보다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현상이 본질을 반영한다지만 모든 현상이 본질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비가시적인 본질에 연결시키는 이상한 형이상학적 충동을 버리지 못한다. 한 존재의 행동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그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고 말겠다는 분류학적 태도는 정작 도서관 사서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사람을 사람으로 느껴야 할 범인(凡人)들에게는 그다지 장려할 만한 태도는 아닌 듯싶다.

사소한 것으로 한 사람의 총체를 엿본다

소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25년간 알고 지냈던 남자 혹은 여자를 하나의 정연한 총체로서 응집시킬 수 없다는 점이고, 다른 이들도 우리처럼 복잡하고 알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짧은 만남 뒤에는 충분히 생각하고 여유와 인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급하게 어떤 사람을 규정짓지 말라는 충고다. 100년 전쟁을 100년에 걸쳐 서술할 수는 없는 법이라면, 한 사람이 보여주는 현상적인 모습을 현상 그 자체로서 가감 없이 그려내는 전기(傳記)는 실상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전기는 하나의 장면과 사태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주목한다. 한 사람의 일상을 이루는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총체를 엿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믿음이다. 그 사소한 것이 음악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잠버릇일 수도 있다. 혹 그것은 누군가가 뒤쪽에서 당신을 부르면 왼쪽 혹은 오른쪽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방향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토핑 부분부터 먹는지 아이스크림부터 먹는지에 대한 당신의 취향일 수도 있으며, 길게 늘어선 줄에 당신이 서있을 때 당신 앞으로 불쑥 새치기를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당신의 반응 유형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우연적인 것, 아주 사소해서 어떤 전기 작가의 레이더망에도 포착되지 않는 것, 드 보통의 책은 많은 페이지를 그런 것들에 할애한다. 사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흘러가 버리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리고 말 우연성,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자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새벽 바다를 걷고 있는 당신의 머리칼을 날리게 하던 바람, 그때 무심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가락, 덧없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리고 말 그 찰나의 장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역사가의 시선이 아니라 연인의 시선이다. 우연적인 순간을 시간 속에 흘려버리지 않고 영원히 가슴 속에 박제화하고 싶다는 연인들의 욕망. 그것은 시간의 풍화 작용에 맞서는 가녀린 저항이다. 사랑은 그 저항의 다른 이름은 아닌지.

소설의 주인공은 그의 연인, 이자벨의 소소한 것들을 기록한다. 위인들의 전기가 한 사람의 유의미한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면 드 보통의 소설은 전기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드 보통은 묻는다. '꼭 위인만이 전기의 적당한 소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라고. 대개의 전기가 위인의 삶을 다루는 것은 그 삶이 가지는 계몽적 효용성 때문이리라. 그런 책들은 '이 사람의 삶을 본받아라. 너의 삶을 반성하라'라고 고압적인 태도로 말하지만 드 보통은 "전기를 읽는 즐거움은 부분적으로는 그들도 나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소소한 국면, ‘의미 있는 시선’으로 보기

아무리 비범한 위인일지라도 결국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말씀이니 진리니 강론해 봐야 결국 먹고 배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우리의 평범함에 안도한다. 전기의 재미는 바로 위인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대체 어떤 재미와 각성을 우리에게 주는가.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하여 간과하기 쉬운 삶을 미학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예술가들은 일상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장대(壯大)한 것, 특별한 것만이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소소한 국면도 '의미 있는 시선'으로 훑어보면 얼마든지 미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평범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 재미라면 재미겠다.

'비일상적인 것의 가치는 복잡한 과거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전기 집필 전통의 숨겨진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리라'고 제법 현학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드 보통은 실상 "당신들은 그녀가 평범하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러나 함부로 판단하지마시라. 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보시라. 그녀와 밥을 먹어 보고, 그녀와 아침에 함께 일어나 보시라. 그녀는 그 소소함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연인들의 항변이다. 사랑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간과하지 않는, 오히려 그 사소한 뉘앙스에 대한 도저한 집착이 아니던가. 생각해 보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저녁의 이상한 푸름에 이끌리고, 무엇이든 놓고 오기를 자주하는 그의 건망증을 사랑하기도 하는, 이런 매혹이 사랑이 아닌가.

역사가와 과학자는 추상의 욕망에 이끌려 한 개인의 다양한 표정에는 관심이 없지만 예술가들은 역사가와 과학자들이 놓쳐 버린 부분에서 놀라운 삶의 통찰을 길어 올린다. 이런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삶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서 비로소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그래,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보일님은 도서 포탈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의 칼럼니스트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독서칼럼집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보일님은 도서 포탈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의 칼럼니스트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독서칼럼집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가 있습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생각의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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