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 만하다는 그들, 혹은 우리의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과 <병원 24시>

등록 2005.09.22 12:06수정 2005.09.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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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뼈가 자라지 않는 쿠루존씨병, 국내에 두 명밖에 없는 면역결핍증 하이퍼 아이지엠 신드롬, 그리고 항문이 없는 질병까지. 생소하고 삭막한 이름의 희귀병들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병들게 한다.

눈물 짓다가도 작은 주먹 움켜쥐고 희망을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희망과 절망, 작은 떨림과 환희의 순간을 반복하는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이다.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이들을 이야기하는 SBS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과 KBS2 <병원 24시>를 통해 우리는 매주 새로운 버전의 인생을 경험한다.

아프지만, 꿋꿋하게

1998년 6월 첫 방송된 <병원24시>(KBS2 화요일 밤 12시)는 7년 넘게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잡았던 장수프로다. 그 힘의 원천은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질병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진리였을 테다. 삶과 죽음의 문턱인 병원을 무대로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감 없이 방송된다.

SBS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SBS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SBS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SBS 일요일 밤 11시 55분)도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이다. ‘휴먼 솔루션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는 것은 희귀병과 장애로 웃음을 잃은 아이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희망을 키워가도록 하는 것이 기획의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는,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절박한 사연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들은 많이 있어 왔다. 대표 주자격인 <사랑의 리퀘스트>는 여전히 좋은 반응 속에서 방영 중이고, 재해가 있을 때마다 각 방송사에서는 질세라 특집방송을 내보내 왔다. 하지만 두 프로그램은 다른 방송들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좋은 기획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리퀘스트>를 볼 때 때때로 제작진이 얼마나 안타깝고 어려운 상황인지만을 강조해 모금액을 높이는데 급급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한 번 불쑥 찾아가 눈물을 뿌려대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반갑지만은 않았다.

양쪽 프로그램에 등장해 병마를 극복하려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힘들게 웃는 이들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큰 감동이다. 몇 주일, 때로는 몇 달씩 함께 하며 보다 현실에 가깝게 다가가 깊은 울림을 이끌어내는 제작진의 수고도 고맙다. 카메라의 시선은 아주 낮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다.


병마와 싸우는 이들을 불쌍하다, 혹은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연민으로 가득 찬 눈길이 아니라, 평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뒤를 좇는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아파하며 울고, 그래도 그 속에서도 빛을 찾아보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출이 아니라 현실이다. 아프지만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삶의 의지다.

적극적인 혹은 담담한 목소리


KBS1 '병원 24시'
KBS1 '병원 24시'KBS
두 프로그램에도 차이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에서는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솔루션 위원회’를 구성해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의료진과 사회복지가, 경제전문가, 국회의원 등의 전문가들이 방송 이후에도 실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쓴다. 직접 발벗고 나선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가족들의 재기를 도와 그들이 희망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병원 24시>는 그에 비해 담담한 목소리를 낸다. 어떤 사람들은 시청자 게시판에 ‘해결책 없이 힘든 상황만 보여줘 방송이 너무 음울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명쾌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싫으면 연출된 드라마를 봐라’는 내용의 답글이 그것이다. 드라마틱한 구성은 아니라 재미는 덜할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인다. 건조하고 담담한 접근은 <병원 24시>의 미덕이다.

아쉬움 몇 조각

그러나 아쉬움이 적지는 않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아예 두 프로그램을 모르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점. 심야시간에 편성되어 있어 프로그램 의도대로 어려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희망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더욱 지적하고 싶은 점은 출연자의 방송 이후의 소식을 알 수 없다는 것. CF에 얼굴을 드러낸 ‘유리공주’ 신원경 양이나 방송 직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던 캄보디아 소녀 러앗따나 등 화제가 됐던 인물을 제외하고는 수술 후의 경과상황이나 근황 모습을 알기는 힘들었다.

물론 출연자의 연락처나 계좌번호 등을 알려 모금활동은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지만, 아픈 현실에서 희망을 찾았던 그들의 다음 행보를 뒤쫓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다. 한 번의 가벼운 외출이 아니라 오랜 시간 손을 잡아주는 여행이 되어주기를 바람을 거둘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그래도 살만하다는...

시청자 게시판에서 ‘상처가 남아도 상관 없으니 내 살을 이식해주고 싶다’라든지 ‘장기를 기증하겠다’ 등의 게시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의사를 밝힌 시청자들 대개는 출연자들에게 연민을 느꼈다기보다 희망을 이어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병마와 싸워나가는 이들에게서 삶의 의지와 희망을 발견했고, 진정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주저앉고 싶을 때, 남들이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것을 보며 힘을 얻기도 한다. 그 힘은 곧 살아야겠다는 의지다. 두 프로그램은 출연자에게 수술비를 마련해주는 등의 실질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점에서 고맙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수술비 곱절의 울림을 경험할 수 있다. 눈물과 환희의 순간을 반복하며 우리는 삶의 의지를 다지는 일을 단련한다. 살아야겠다는, 그리고 살만하다는 깨달음. ‘그들의’ 여행을 지켜보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해나간다는 느낌은 그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쟈임(www.zime.co.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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