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낙엽송잎으로 양념을?

등록 2006.11.20 13:38수정 2006.11.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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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풍나무 너머 배추밭과 낙엽송 숲.

단풍나무 너머 배추밭과 낙엽송 숲. ⓒ 김선정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 철이 다가왔다. 서울은 아직 이르지만 강원도는 추위가 빨리 오는 탓에 집집마다 배추 뽑고, 무 들이느라 바쁘다.


온통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은은한 갈색으로 물든 낙엽송 숲을 걸으며 가을의 정취에 흠뻑 취해보고 싶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김장할 배추, 무 농사를 짓고 백 포기 남짓한 배추김치와 동치미, 알타리 김치를 해왔다. 이제는 남편도 많이 익숙해져서 밭에서 무, 배추를 뽑아다가 다듬고 씻는 일을 척척 해낸다.

유난히 가뭄이 길었던 날씨 탓에 가으내 배추밭 물 주는 품도 만만치 않았는데 배추포기가 영 신통치 않다.

“배추 꼴이 왜 이래?”
“그러게 말이에요. 당신이 주말마다 물 주느라 애썼는데, 보람도 없이. 통이 하나도 안 앉았네.”

a 배추밭. 통이 더러는 통이 든 놈도 있다.

배추밭. 통이 더러는 통이 든 놈도 있다. ⓒ 김선정


a 장다리꽃. 미처 봅지 못하고 둔 어느 집 밭의 배추곷이 철 모르고 곱게 피었다.

장다리꽃. 미처 봅지 못하고 둔 어느 집 밭의 배추곷이 철 모르고 곱게 피었다. ⓒ 김선정


우리 부부는 퍼런 잎과 노란 속만 있는 배추를 이리 보고 저리 뒤적이며, 심난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농사에 대해서만은 낙천적인 남편이 이런 배추가 더 고소한 법이라면서 김치 해 놓으면 맛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이다. 나도 질 수 없어 이런 배추가 절이기도 쉽고, 씻기도 쉽다고 애써 나 자신을 안심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다시 불거졌다. 차라는 배추 속은 안 차고, 배춧잎 갈피갈피에 낙엽송 잎들이 그득한 것이 아닌가. 바늘처럼 생긴 갈색 잎은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김장에는 보도 듣도 못한 양념 한 가지가 더 추가 될 게 분명하다. 낙엽송 잎 양념, 이 새로운 재료는 김치가 익을수록 더 짙은 갈색이 되면서 다른 양념들과 잘 어우러지겠지만 역시 골라내야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저녁 무렵이 되면서 바람이 불고 점점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 두 개에 배추를 절여 놓고, 무를 씻고, 대파와 쪽파를 씻었다. 마늘, 생강을 찧고 황태, 다시마국물도 진하게 내려 큰 함지박 가득 식히고 나자 얼추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벌써 허리가 시큰거린다.


a 말갛게 씻어놓은 무. 작은 씨앗을 심어 이렇게 고운 무가 땅 속에서 자란다는 것이 신비롭다.

말갛게 씻어놓은 무. 작은 씨앗을 심어 이렇게 고운 무가 땅 속에서 자란다는 것이 신비롭다. ⓒ 김선정


“좀 쉬었다가 하자구.”

이럴 땐 남편의 쉬자는 목소리가 제일 반갑다.

싱싱한 배추 잎을 된장에 푹 찍어 한 입 가득 넣고 아삭거리며 먹는데 남편은 어느새 맥주를 가득 따라 내게 내민다. 밖에서 추위에 떨었던 건 잊어버리고, 시원한 맥주 맛에 진저리를 친다.

“이 맛에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모르나봐.”

나는 술꾼이라도 된 것 마냥 자작해서 또 한잔을 달게 마시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 이 난다.

a 남편이 채쳐 놓은 무. 남은 부분은 석박지로 넣은다. 푹 익은 김장 김치에서 꺼내 먹는 석박지는 또 다른 맛이다.

남편이 채쳐 놓은 무. 남은 부분은 석박지로 넣은다. 푹 익은 김장 김치에서 꺼내 먹는 석박지는 또 다른 맛이다. ⓒ 김선정


어머님은 내가 시집오기 전까지 늘 혼자서 김장을 담그셨다. 100포기 김장을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해 오신 것이다. 이렇게 힘든 일을 혼자 감당하고, 좀 쉬었다 하라고 술 한 잔 건네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일만 하신 분이다. 내가 시집 와서도 몇 년 동안은 별로 도와 드리지 못했다. 그저 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였다.

어머님의 김치는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시원하고 개운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비싼 재료도 아니었고 색다른 양념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머님의 김치에는 시간과 정성이라는 양념이 녹아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슈퍼에서 편리하게 액젓을 사거나, 젓갈시장에서 사지만 어머님은 일일이 집에서 젓갈을 담그셨다. 봄이 오면 '황새기'라고 부르는 조기 새끼를 사서 소금에 버무려 큰 독에 담고 창호지로 밀봉을 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나 창고에 두었다가 김장철이 다가오면 커다란 솥에 부어 한 시간쯤 푹 곤다. 그러고 나면 삼베 보자기에 걸러 말갛게 된 액젓을 식혀서 김장할 때 썼다.

a 삐뚤빼뚤 썰어놓은 깍뚜기. 아삭아삭한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듯 하다.

삐뚤빼뚤 썰어놓은 깍뚜기. 아삭아삭한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듯 하다. ⓒ 김선정


젓갈 하나도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다른 재료야 말해 무엇 할까.

꼭 김장뿐만이 아니라, 어머님의 음식에는 언제나 때, 즉 철이 있었다. 음력 삼월 삼짇날은 장을 담그셨고, 오월에는 마늘장아찌를 담그고, 매실주도 담갔다. 유월에는 장마 지기 전에 두고 먹을 저장용 육쪽 마늘을 샀다. 장마가 끝나면 굵은 소금을 한 포대 사놔야 했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호박고지와 무말랭이, 무시래기를 말리고, 고추 장아찌를 담갔다. 물론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김장을 담그고 메주 쑤는 큰 일을 마쳐야 했다.

김치뿐만 아니라 간장 된장도 다 사먹는 세상이 되어 버린 요즘, 어머님께선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하긴 나도 가끔은 슈퍼에 보기 좋게 진열돼 있는 김치를 사고 싶을 때가 있다.

a 절였다가 씻어놓은 배추. 비록 통은 잘 앉지 않았지만, 무공해 무농약 배추 맛은 일품이다.

절였다가 씻어놓은 배추. 비록 통은 잘 앉지 않았지만, 무공해 무농약 배추 맛은 일품이다. ⓒ 김선정


한 번은 작은 아이 때문에 시장에서 김치를 산 적이 있었다. 유난히 김치를 좋아하는 작은 아이와 시장을 보러 갔는데 마침 아주머니들이 모여 먹음직스러운 겉절이를 무치고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아이는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침만 삼켰고 그것을 본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 입에 김치 한 조각을 얼른 넣어 주셨다.

“하이고, 쬐깐한 애기가 짐치를 참으로 맛나게 먹네 잉!”
“얘, 넌 맵지도 않니?”

아주머니들은 입술이 벌겋게 되면서도 또 먹고 싶어서 입맛 다시는 녀석이 신기한지 한 마디씩 던졌다. 그때였다. 녀석이 김치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김치를 샀다. 물론 그 김치는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두고두고 작은 녀석의 토종 입맛 덕분에 남도의 진한 김치 맛을 보게 된 얘기를 했었다.

a 양념을 버무려 김치 속을 만들다. 매콤한 기운이 입 안 가득 퍼지다.

양념을 버무려 김치 속을 만들다. 매콤한 기운이 입 안 가득 퍼지다. ⓒ 김선정


입맛은 기억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날씨가 추워지면 옛날에 엄마가 끓여 주시던 비지찌개, 숭숭 썬 돼지고기 몇 점이 떠 있고 신 김치를 넣어 고소하면서도 개운한 그 맛이 생각난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면 친정 엄마는 살얼음 잡히는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말아주셨다. 우리 형제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턱을 덜덜 떨면서도 냉면 국물의 쨍한 시원함에 자꾸 자꾸 국물을 마셔댔었다. 그리고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던 기억이 난다.

김장하는 날은 모처럼 고기 먹는 날이었던 것 같다. 배추를 다 절여 놓고, 돼지고기를 삶아 썰고, 빨갛게 버무린 속과 절인 배추를 말갛게 씻어 큰 접시에 같이 담아 먹던 것이 떠오른다.

“고만 놀고 일 다시 시작해야지.”

어느새 남편은 그 많던 무를 다 채쳐 놓고, 나를 채근한다.

“깍두기 할 거랑 백김치에 들어 갈 무는 남겨야 돼.”
“벌써 남겨 놨습니다. 싸모님.”

남편은 힘들지도 않는지 짐짓 우스갯소리다.

“이렇게 일만 하는 싸모님 있으면 나오라 그래. 아이구 허리야.”

나도 모르게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할 일은 계속 나온다. 무 시래기를 엮어 널어야 하고, 배추 시래기도 데쳐야 한다.

새벽에는 배추를 한 번씩 뒤집어 줘야 하고, 대충 아침밥을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김치 속을 버무려 주어야 한다.

다음날은 어제보다 따뜻해서 밖에서 일하기가 훨씬 쉬웠다. 낙엽송 이파리들과 씨름하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우리 시골집 지하수인 105미터 천연 암반수로 깨끗하게 씻어 놓으니, 통 안든 배추일망정 그 자태가 훤했다.

a 양념을 버무려 담근 김장 김치. 독 속에서 겨우내내 제 몸을 익혀가리라.

양념을 버무려 담근 김장 김치. 독 속에서 겨우내내 제 몸을 익혀가리라. ⓒ 김선정


수돗가 자갈밭에 두 내외가 자리 잡고 앉아, 점심때를 놓쳐 가며 배추 속을 넣었다. 지난 주에 담은 동치미독은 빼고, 두 독에 그득하게 채웠는데도 김치가 남아 창고에 더 넣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깍두기를 버무려 독에 넣는데 여태 흙장난하느라 기척도 없던 작은 아이가 쫒아와 김치를 먹겠단다. 창고에 두려고 묶어 놨던 비닐을 풀어서 배추김치를 좀 퍼냈다. 배춧잎을 되는 대로 쭉쭉 찢어 입에 넣어 주니, 삭지 않아 고춧가루 범벅인 배춧잎을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저렇게 먹다 물켜지.”
“맛있니?”

아이는 엄마 아빠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곤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김치를 집어다 먹는다. 매운지 헉헉거리면서도 열심히 먹더니 이번에는 깍두기에 도전하겠단다.

우리 부부는 녀석의 식성에 혀를 내두른다.

“엄마, 그런데 우리 집 김치 냉장고는 장독이지.”
“뭐라구?”
“이모네 집 김치 냉장고는 부엌에 있지만, 우리 집 김치 냉장고는 땅속에 있잖아. 또 우리 집 김치 냉장고는 세 개야. 이모네는 하난데.”

벌써 몇 년째 녀석은 그렇게 김장독을 김치 냉장고라고 우긴다. 우리는 아이의 그럴 듯한 말에 웃고 말았다.

a 깍뚜기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깍뚜기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 김선정


이젠 겨울이 닥쳐와도 걱정이 없다. 우리에겐 김치 냉장고가 세 개나 있고, 또 그 안에 맛있는 김치가 그득하니까. 겨우 내내 우리 가족은 푹 익은 김장 김치를 꺼내 낙엽송 양념을 골라내 먹으며, 이제는 돌아가신 시어머님과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내게 김장은 기억을 되살리는 음식 만들기이며, 새댁이었을 때의 시어머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리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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