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만에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친구와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부산에 사는 나와, 경기도 부천에 사는 친구 선이는 서울에서 만나, 함께 강릉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2005년 4월 12일 화요일. 평소 차분한 마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난밤 잠을 설치면서 보고 또 보고, 꼼꼼히 짐을 줄이며 챙겼음에도 뒤로 메는 가방도 모자라 소품가방까지 들었다. 난생 처음가보는 2일~3일 예정의 기차여행인지라 내가 봐도 차림새가 어색하고 슬금슬금 주위를 의식하게 된다.
부산 구포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가는 것부터 여행이 시작된 셈인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장밖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아무 기억이 없다. 다만, 눈을 감았다 뜬 느낌일 때 두세 번 와본 서울역 신청사에 서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친구 선이를 만났다. 내가 탄 열차가 7분여 연착되어 마음을 졸였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서로가 별로 변하지 않고 생각보다 그대로라는 안도감을 표현하면서 부천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보내며 그간 세월에 쌓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이 짧지 않았던 탓인지 아침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시작을 하기 위해 가닥을 잡은 정도일 뿐이다.
아침 일찍 부천역을 출발하여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경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양평, 원주,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강릉을 향해 기차는 간다.
기차가 지나가는 주변 풍경은 내가 힘들게 살아온 세상풍경이 아니었다. 우리 둘을 어느 영화에 나오는 화면 속에 주인공이 된 착각 속에 빠지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끝에 만난 호기인지 친구 선이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그동안 못해본 것들을 다 해보자고 미리 약속해두었다.
우선 커피를 마시면서 자나가는 창밖을 보며 달리는 카페를 연출했고, 계란을 서로의 이마에 팍 때려서 까먹으며 깔깔 웃는 소녀로 돌아가 보기도 했다. 김밥을 사먹으면서 수학여행 이야기도 했고 캔맥주를 먹으면서는 서울살이 고달픈 이야기, 남매를 명문대에 졸업시킨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달리는 구간의 협곡과 산, 강만큼이나 지나온 두 여인네의 50년도 달리는 듯했다.
느낌에 기차가 느리게 간다 싶더니 객차 안에서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스위치백 구간이란 가던 길을 기차가 다시 되돌아오는 구간이라고 한다. 친구와 나는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파른 산에 걸쳐져 있는 기차의 앞에는 더 이상 철길이 없고, 숲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뒤쪽으로 어렵게 움직이던 기차가 이번에는 까마득한 저 아래 계곡을 보여주었다. 잘못하면 떨어질 것만 같은 아찔한 풍경 앞에 우리 둘은 눈으로만 말할 뿐, 더 이상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책에서 흥전에서 나한정까지의 스위치백 구간을 보며 기회가 되면 가봐야지 했었다. 오늘 생각지도 않은 이 구간을 지나게 될 줄이야. 오늘 내가 이 구간을 지나게 될 것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 단지 청량리에서 정동진 가는 구간을 타보고 싶어서 기회를 만든 것인데, 20년의 그리웠던 우정의 회포를 푸는 자리에 대한 선물인가보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온 몸으로 느끼고 가게 되었다.
우리 둘은 이번 여행에서 만든 추억을 마음 벽장에 곱게 넣어 두었다가 더 나이 들어서 행동이 불편하여 만나지도 못하고 목소리만으로 안부를 묻게 될 때, 이날을 추억하며 노년을 보내자고 손가락 걸고 맹세했다. 우리의 쌓인 우정만큼이나 기차도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지나고 있었다.
이번 철도여행은 10여년 전 승용차로 여행하던 중 정동진역에서 우연히 청량리에서 출발한 기차를 보고 막연히 세웠던 계획인데, 20여년 전 생활여건 때문에 훌쩍 서울로 이사 간 둘도 없는 친구와의 재회로 서로의 의기투합, 흔쾌히 이뤄진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소중한 추억이었다. 또 나는 앞으로도 완행열차로 전국 철도를 한바퀴 돌아보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 창밖 풍경을 지켜볼 수 있는 기차여행을 권하고 싶다. 도란도란 지난 세월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지나는 풍경만큼이나 비워진 세월을 채우는 느낌이 들어서다.
덧붙이는 글 | *흥전과 나한정사이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이 곧 터널의 개통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철도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오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