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 혼 보여준 우리 시대 사기장

조선사발 '이도다완' 재현한 사기장 신정희옹 18일 별세

등록 2007.06.19 13:42수정 2007.06.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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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기장 고 신정희옹는 18일 오후 7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생전 불보기 작업 중인 신정희옹

사기장 고 신정희옹는 18일 오후 7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생전 불보기 작업 중인 신정희옹 ⓒ 신한균

500여년 동안 잊혔던 조선사발을 재현하여 그 명맥을 이은 집념의 장인이 바로 고 신정희(申正熙·향년 77세)옹이다. 80평생을 전통도자기 재현에 몸을 바친 그는 생전 경남 양산시 통도사 뒤 영축산 자락에서 신정희요를 운영하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도자기는 내 종교이며, 내 인생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해온 그.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에 경남 사천의 한 갯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월사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는 게 우선이어서 소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19살 청년이 된 그는 평소처럼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가 인근 삼천포 중학교 학생들과 국어선생이던 초정 김상옥(1920-2004년)을 만났다. 삼천포, 사천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된 시조시인이던 김상옥은 개울가에서 사금파리 한 조각을 학생들에게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고려청자 쪼가리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의 혼과 얼이 담겨있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위대함이 바로 이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청년은 그날 이후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괜스레 지겟작대기로 흙더미를 파헤쳤고 얼마지 않아 한 가마니 넘게 사금파리를 모았다.

13년만에 재현한 조선 사발, 일본에서 먼저 알아봐

한국전쟁기를 포함해 8년간 군대생활을 한 그는 제대 후 결혼해 가장이 됐지만 여전히 '그릇귀신'에 홀려 전국을 헤매고 다닌다. 부산에서 골동품상을 차리고 일본인들을 만난 그는 일본의 도자기 국보 1호로 올라있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인 '기자에몬 이도'가 실은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사라져가던 옛사발을 재현해내기로 결심했다.


집안은 내팽개친 채 무작정 옛 가마터를 찾아 전남 고흥과 보성, 강진, 무안, 경북 청송, 고령, 문경, 충북 단양, 경기 이천, 경남 진주, 하동, 산청, 합천, 사천, 웅천, 양산, 울산, 포항, 김해, 그리고 제주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기를 200여 차례.

불과 흙과 씨름하던 그는 1968년 이도다완의 원형인 황도사발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500여년간 제작 비법이 끊긴 황도사발을 재현해내자 일본의 도예계가 먼저 알고 흥분했고, 인사동의 골동품상들은 조선시대 진품이라고 감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골동품 도굴꾼으로 몰리기도 했다.


현재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내에 신정희요를 운영했던 사기장 고 신정희의 평생은 집념과 오기의 연속이었다. 그의 말처럼 "도자기는 종교이며 인생의 모두"였다.

사기장으로서 그의 작품은 '소박하나 정교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기 위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흙'이었다.

"도자기는 첫째도 흙이고, 둘째도 흙이다. 셋째가 있다면 그것은 불때기이다… 나는 언제가 흙을 고를 때는 직접 입에 넣어 씹어보면서 맛을 본다. 입에서 흙 특유의 '꼬신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조선사발을 '막사발'이라고 통칭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막사발이라는 용어는 "일제 때 왜(倭)사기는 좋은 사발이고, 우리의 조선사발은 형편없는 사발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붙여놓은 이름이 막사발이었다. 이를 통칭하여 '사발'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노란색 사발을 일러 '전승도예의 개가'

a 고 신정희옹의 자서전 <흙과 불 그리고 혼-사기장 신정희> 표지

고 신정희옹의 자서전 <흙과 불 그리고 혼-사기장 신정희> 표지 ⓒ 북인출판사

현재 그의 도자기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 일본인들은 그가 재현한 비파색 분청사발을 가리켜 '환상의 그릇'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그의 노란색 사발을 일러 '전승도예의 개가'로 평가했다.

1970년대 당시 정계의 거물이던 김종필씨가 일본에 갈 때 그의 작품을 가져가 선물한 것이 알려진 뒤로 한국 정부도 그를 한국 도예계를 대표하는 도예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을 찾는 국빈이나 각국 외교사절들의 선물로도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다. 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그의 작품이 전해졌다.

도자기가 '종교와 신앙'이었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자기는 손으로 빚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그릇을 빚을 때 한갓 형태에만 집착하지 말아라. 흙에서 꼬신내를 느껴야 비로소 사기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자서전 <흙과 불, 그리고 혼-사기장 신정희>(도서출판 북인)는 젊을 때 작은 계기로 도자기에 매료돼 외길만 걸어온 장인의 일생이 담겼다. 각자의 요를 차리고 있는 그의 아들 넷과 제자들의 이야기, 그의 창작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온 일본인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 그의 대표작 사진도 실렸다.

공교롭게도 고인이 타계하신 지난 6월 18일, 이미 1년 6개월 전부터 추진해오던 자서전인 <흙과 불 그리고 혼-사기장 신정희>를 펴낸 저희 출판사 입장에서는 최근 1주일 사이 갑자기 선생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안타까웠다. 하지만 고인이 살아 계시기 전에 책을 발간해 보여드릴 수 있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긴 한다.

발인은 22일 오전 9시. 고인의 가마가 있는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내에서 일반인으로는 처음으로 다비식이 치러질 예정이다. 장지는 경북 영천의 국립영천호국원. ☎051-583-8906

일본 명사가 지켜본 사기장 신정희

한국 도예계에서 한 시대를 구축한 거장 신정희

한국 도예계에서 한 시대를 구축한 거장 신정희씨는 한국전쟁에 참전, 제대 후 혼란 속에서 끼니 해결을 위해 골동 도자기를 사고파는 장사를 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고려나 조선의 청자, 분청사기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감정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약 1,000년의 역사는 중국에 이어 도기의 위대한 문화가 번성한 풍토였던 것을 거장은 몸소 실감했던 것이다. 통도사 언덕에 있는 가마에서 구워져 나오는 그의 작품에는 오랜 한민족의 역사가 전승되는 것은 물론이고 장인정신이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쿠와바라 시세이/ 보도사진작가, 구와바라시세이박물관 명예관장

옛 도기를 현대에 살아 숨쉬게 한 '불꽃 같은 삶'

신정희 선생은 고려청자에 조선시대 다기인 고려다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 유약, 그리고 불꽃을 찾아냈다. 그런데도 신정희 선생은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신께서 만들 수 있게 해주셨다"며 신에게 감사했다. 또 "도자기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마음으로 만들면 신이 도와준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려나 조선의 도기를 현대에 살아 숨쉬게 한 신정희 선생의 생애가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의 '불꽃 같은 삶'을 통해 고려 도기의 신비함, 깊은 맛을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구니시게 마사토시/ 야마구치현 야나이시 문화협회회장

<흙과 불 그리고 혼-사기장 신정희> 본문 소개

1장 흙의 노래, 2장 불의 노래, 3장 혼의 노래는 사기장 신정희의 출생부터 전통 사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사금파리에 빠졌던 젊은 시절의 에피소드, 문경에 가마터를 마련하고 전통 사발을 재현하기까지의 고난과 역정, 전통 사발인 황도사발을 재현한 이후 지금까지 도예계의 대가로 활동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장 여백의 창은 1970년대부터 그의 작품활동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온 일본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생생한 현장사진과 남기고 싶은 사기장 신정희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도자기 작품 사진이 30여 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5장 인연의 길은 인간 신정희에 대하여 또는 도예가의 거장인 신정희 작품과 관련된 쿠니시게 마사토시(야마구치현 야나이시 문화협회회장), 다니 아키라(일본 노무라미술관 학예부장 등의 글과 아들 4형제를 포함한 제자 16명이 밝힌 그와 제자가 되었던 사연, 그의 가르침 등이 쓰여 있다.

6장 흙과 유약, 그리고 불 이야기는 도예가로 활동하며 신정희요의 계승자인 그의 장남 신한균에게 가르친 도자기를 제작하는 전 과정이 장남 신한균의 맛깔스러운 글로 맛볼 수 있다. 도자기 만들 때 가장 중요한 흙 구하기, 좋은 흙과 바쁜 흙 구별법, 도자기의 겉옷이라 할 수 있는 유약 만들기, 도자기의 기본인 흙 다음으로 중요한 초벌구이와 재벌구이 때의 불때기의 비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북인. 320쪽. 1만8천원.

덧붙이는 글 | 조현석 기자는 도서출판 북인 대표입니다.

덧붙이는 글 조현석 기자는 도서출판 북인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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