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카이사르 시대, 누가 주역이 될 것인가?

시오노 나나미의 영웅만들기

등록 2007.06.25 10:05수정 2007.06.2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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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대중적인 작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마 제4권과 5권의 카이사르 이야기였을 것이다. 독자들은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섬세한 묘사에 반했고,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로마인이야기>의 마니아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야기>를 서술함에 있어서 로마 최고의 영웅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선택했다. 이 영웅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작가는 15년 작업 중 2년을 할애했다. 비록 로마제국의 개막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지만, 카이사르야말로 로마제국의 출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3권까지 특별한 주인공을 내세우기보다는 '로마' 자체를 자신의 이야기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이끌어왔다. 이전까지 로마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는 나라가 아니었고, 로마 시민들 자체가 로마를 이끌어왔다. 로마를 침몰 직전까지 몰고 간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로마는 전 시민이 단결해 위기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 확인했다.

공화정을 선택한 로마는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 아니라, 대중의 선택(물론 이것이 순수한 대중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에 의해서 국가를 운영하였다. 대중의 선택이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는 천천히 그러나 조금씩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인물이 제4권과 제5권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전까지의 '로마' 자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전개하던 방식을 과감히 변형하여 한 개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집중하여 영웅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보면, 영웅의 주변 인물들은 말 그대로 주변인으로 묘사되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모든 이야기는 영웅에게 집중되고, 주변인들은 영웅의 뛰어남을 보충해주거나 강조해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한다.

물론 카이사르의 개인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영웅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양보 혹은 희생이 필요했다. 카이사르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들이 그러한 카이사르의 뛰어남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따라서 로마인이야기 제4권과 제5권은 카이사르라는 중심인물과 수많은 주변인이 만들어낸 공화정 말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 누가 주역이 될 것인가?

역사는 카이사르라는 위대한 천재를 만나면서 한 가지 나름대로의 고민거리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 영웅이 퇴장한 이후의 역사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다. 카이사르 시대를 맞이하여 역사는 '누가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를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준비 단계가 필요했다. 인물을 선택해야 했고, 그 인물이 카이사르 시대를 책임질만한 수업을 충실히 이행했어야 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암살로 일찍 퇴장해 버렸다.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를 맡기 위한 인물은 카이사르의 주변인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카이사르의 주변인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세 사람이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되어도 손색이 없었던 군사 천재 안토니우스, 이집트의 운명을 거머쥔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무명의 존재에서 로마 초대 황제로 등극한 옥타비아누스였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여성이고, 이집트 출신이기에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를 차지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로마의 일인자 싸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통해서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를 향한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운명은 각자에게 이전 인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을 제공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언급되지 않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공동전선과, 유언장에 의해서 일약 주목을 받게 된 옥타비아누스의 대결로 역사의 흐름은 진행되었다.

군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끝내 몰락한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는 후대에 이야기를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이야기꺼리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일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좋게 말하면 사랑을 선택했고 나쁘게 말하면 사랑에 빠져 허덕이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인물이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제국을 분할 통치한 안토니우스는 선임자(카이사르)의 가장 훌륭한 후계자가 될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끝내 후계자로 18세 무명인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했다. 선임자에게 선택되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비슷한 좌절감을 갖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공동으로 연합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었다.(물론 안토니우스의 남성미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에게 버림받은 영웅, 그는 주어진 환경을 능동적으로 뚫고 나갈 의지가 부족했다. 그것이 카이사르와 다른 점이었다. 어찌 보면 카이사르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닮은꼴 영웅' 안토니우스와 생사를 함께 했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선택하지 않았다. 역사는 한 사람의 천재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닮은꼴 영웅'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시대에 이미 로마 전역은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는 확보된 영토를 기반으로 내실을 기하는 단계에 적합한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을 법하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눈에는 군사적인 재능 이외에 제국을 경영할 현명함은 부족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운명을 내걸었던 클레오파트라

연인인 클레오파트라의 소망을 외면한 카이사르의 유언장 내용을 놓고 시오노 나나미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배려한 조치였을 거라고 변호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호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단지 6개월 전에 작성된 유언장은 카이사르가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한창 나이에 작성된 것이고,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한껏 높이다보면, 이 유언장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여하튼 유언장 내용에 실망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위한 선택으로 또 한 사람의 영웅 안토니우스를 선택했다. 역사적으로 안토니우스가 패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이성을 잃어버린 역사적인 머저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이고,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쉽다.

로마 군단 방식으로서는 뛰어난 전략 전술가인 안토니우스에게 동양적 군주제에 익숙한 이집트 군단은 어울리지 않았고, 이집트(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에 대해서 로마인의 우월성은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로마인은 로마의 천재적인 군사전략가가 이집트의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홀려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자초했다고 평가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은 전통적인 역사 해석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여성의 입장에서, 혹은 반(反)로마의 입장에서 클레오파트라를 평가한다면 조국 이집트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존시키려는 여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로마 중심, 남성 중심, 그리고 카이사르 중심의 로마인이야기를 작성하는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를 연 옥타비아누스

여하튼 카이사르는 무명의 인물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했다.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일화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얼마나 미완성이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분에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은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유언장'의 최대 수혜자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카이사르의 현명함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루비콘 강을 건널 당시 주사위를 던지며 자신의 운명을 시험했던 카이사르는 죽음 직전에 '엉뚱한'(?) 유언장으로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에 대한 운명을 시험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안토니우스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행동했더라면 역사의 승자는 안토니우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후대 역사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대해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을 것이고, 작가는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른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시작한 로마 제국이 엄밀히 따지면 카이사르의 유산이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후 로마제국은 카이사르의 영향권에 대해 상당히 빚진 상태로 유지된다. 카이사르의 혈통은 황제 후보자가 되기 이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더 이상의 영웅은 없다

역사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카이사르의 후광을 입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포스트 카이사르의 시대를 여는 동시에 팍스로마나 시대를 열었던 인물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업적면에서는 카이사르를 능가할지 모르지만 대중적인 인기면에서는 카이사르에게 훨씬 뒤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포스트 카이사르 시대를 연 영웅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천재 카이사르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옥타비아누스가 비록 카이사르의 후광을 바탕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며 로마의 일인자가 된 것은 또 다른 천재성이 없다면 달성할 수 없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카이사르를 능가할 영웅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를 뛰어나게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주변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지는 현상은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천재적인 능력이 있었지만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그것이 천재성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음모와 술수에 능한'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영웅이 퇴장한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은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것 같다.

비판적 독서가 필요한 책, 그러나 이만한 로마 안내서는 없다

로마제국을 시오노 나나미처럼 쉽게 알려준 책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로마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영향력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소개한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쿨라, 네로 등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 인물들을 마치 옆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묘사가 잘 되어 있다.(물론 번역서이기 때문에 번역자의 노력도 많은 부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이야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제국주의적 사관, 영웅중심의 사관, 남성중심의 사관 등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현혹시킨다는 지적이다. 물론 극단적인 비판이지만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역사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영웅도 될 수 있고, 역적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로마 역사에 대해서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를 처음 접했던 필자로서는(솔직히 너무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이야기>를 접하고는 거의 단숨에 5권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본격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제6권 <팍스로마나>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로마제국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사료를 비교하면서 <로마인이야기>를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정된 지식과 사료를 갖고 <로마인이야기>를 곱씹어 나가면서 어떤 부분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밑줄을 치고, 어떤 부분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감탄을 하면서 읽어나갔다. <로마인이야기>는 "비판적인 독서가 필요하지만, 뛰어난 로마 안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로마인이야기'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이야기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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