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는 9월 13일자에 신정아씨의 누드사진이 여러장 발견됐다며 이를 입수에 3면에 게재했다.
문화일보 촬영
<문화일보>의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 게재는 생각할 수록 미스터리한 일이다.
변양균씨로 압축되는 청탁 비리와 그 누드 사진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했다고 해도,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미친 거야?"라고 어이없어한다. 언론연대 양문석 사무총장은 "<문화일보>는 인격살인자 도색잡지다"라고 선언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문석씨의 "살인자"라는 표현이 크게 무리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일보>는 정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일까.
미친 <문화일보>, 새삼스럽지 않다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일보>는 원래 그랬다. 나는 이번 사건이 몇몇 기자 혹은 데스크의 '판단 미스'가 일으킨 돌출적인 사건이었다기보다는 이미 문화일보의 행보 속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강안남자>같은 포르노 소설을 연재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문화일보는 한국 성인 남성들의 도색잡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뿐 아니다. 2002년 지하철, 버스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문화일보> 광고에는 신문을 쫙 펼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와 그 여자를 둘러싸고 호기심에 가득 찬 남성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 광고의 메인 카피는 "보고 싶다 문화일보"였다. 이 남성들의 시선을 '지적 호기심'으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일보>는 원래 성인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 일간지였다. 단지 이번에 문화일보는 도상과 상징적 의미체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엄연히 살아있는 한 존재를 말 그대로 벌거벗기는데 서슴없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들의 행각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라는 낡은 분석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운 문화적 충격이기도 했다.
도색적이어서 나쁜 게 아니다. 모든 도색잡지는 나쁜가. 성적 호기심이 천박하고 지적 호기심은 고상한가.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문화일보>를 '인격살인자 도색잡지'라고 하는 것은, 속은 후련하지만 타당한 표현은 아니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문화일보>는 여성에게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잊음으로써 남성의 성충동을 옹호하는 여성혐오 남성숭배 잡지다. 그렇기 때문에 '도색잡지'라는 비난, '인격살인자'라는 비판은 일견 타당하지만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