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 역을 맡은 오만석
sbs
우선 최근의 동성애코드가 그러하듯이 내시를 전면화하는 이 드라마는 우리가 감히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었던 내시라는 낯선 타자의 감추어진 은밀한 속살을 들추어내려는 관음적 욕구로 넘쳐난다. ‘남성의 거세’라는 원초적 장면에 대한 이토록 상세하고 집요한 묘사는 지연되는 천동(주민수·오만석 분)의 거세 장면으로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단지 선정성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끔찍하고 참혹한 거세공포를 강렬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거세공포를 넘어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의 입궐에의 의지는 그들이 거세에 이르게 되는 사회사적 배경과 함께 내시권력의 형성을 위한 확실한 출발인 셈이다.
게다가 이러한 내시세계의 적나라한 묘파는 남성중심 왕권사회와 성별 이분법적 세계의 외설적이고 폭력적인 이면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섹슈얼리티를 상실한 제3의 존재인 그들은 평생 무화(無化)의 고뇌와 비인간(非人間)의 통한을 감내해야만 한다. 무소불위의 폭압적 왕권사회가 만들어내는 어두운 그늘 속의 그들에게는 만민평등의 민주사회에서 오늘날의 성적 소수자들이 제3의 성으로서 겪는 고통이 오버랩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천동(처선)과 소화(폐비 윤씨, 박보영·구혜선 분), 자을산군(성종, 유승호·고주원 분)의 질기고 모진 삼각 인연이다. 사극의 멜로 코드가 매력적인 이유는 계급갈등이 전면화된다는 점으로, 신분제사회의 상하 종속관계가 운명적 사랑의 비극성을 낳는 데 있다. 소화에 대한 사랑이 어린 천동을 내시의 운명으로 몰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형(天刑)으로서의 그의 사랑이다. 내시가 되어서라도 사랑하는 두 사람의 행복을 지켜보고 지켜주는 것, 그것이 그가 택한 사랑의 방식이다.
그의 비극은 그가 소화와 성종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그는 왕의 그림자가 되어 그와 합체하려는 욕망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소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왕의 사랑으로 전이시킨 후에, 그는 자신의 성욕을 육근단지 안에 가두고 자신을 유폐시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성종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거세한 건지도 모른다. 왕 옆에서 그의 수족이 되고 평생 그의 동무가 되기 위해. 타고난 삼능삼무의 충신의 운명은 그가 성종의 연적이기보다 그의 연인이었을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처선의 애욕과 권력욕은 아마도 성종에 대한 사랑과 그에 대한 질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아무래도 거세된 존재로서의 내시들이 어떻게 막강한 권력을 획득해 가는가 하는 점이다. 드라마는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을 수장으로 하는 세력화한 내시들을 권력쟁투의 중심으로 복권시켜냄으로써, 그들에게 잃어버린 남성을 대신할 막강한 권력과 부를 되돌려준다. 내시라는 존재를 통해 남성들의 심연에 있는 거세공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의 권력화과정을 통해 위축된 남성을 되살려내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장차 처선의 양부가 될 조치겸은 예종의 내시 금혼령을 목숨을 건 파무 주동으로 철회시키고, 결국 왕의 독살까지 주도하는 인물이다. 그는 조정대신들과 대왕대비를 막후에서 조정할 정도의 파워로 내시부를 지배체제의 보이지 않는 배후세력으로 키워놓았다. 조치겸의 겸양 섞인 ‘일개 내시인 제가’가 품고 있는 실질적 파워는 매서운 것이다. 그는 비천한 척, 하찮은 척 몸을 낮추면서 권력자들의 치부와 약점을 이용해 그들의 목을 죄는 외유내강의 정치술수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들이 약삭빠른 간신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품위와 위엄을 잃지 않는 조치겸과 그가 이끄는 내시부는 무사들 못잖은 매력적인 남성미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며, 일사분란하고 철저한 내부결속과 기강, 의리의 권력조직을 형성한다.
또한 이들은 여느 지배세력과 마찬가지로 혼인과 양자관계를 통해 권세를 영구화하려는 권력과 부의 세습욕을 드러낸다. 치겸이 천동을 양자로 맞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는 데서 드러나 듯, 이러한 양자관계에의 집착은 거꾸로 부계사회의 핏줄에 대한 애착이 결국 권력과 부의 세습욕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들이 획득하는 권력은 이들의 잃어버린 남근의 대응물임이 명확하다. 이것은 역으로 남성권력과 욕망의 기원이 남근이라는 물적 존재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권력과 욕망의 기원으로서의 남근은 그렇게 남성지배사회의 상징적 기표가 되어 끊임없이 순환한다. 한편으론 거세된 그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으로 다른 한편으론 그들의 부활에 대한 통쾌한 대리만족으로, 그렇게 고개 숙인 남자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간지 < PD저널 > '방송 따져보기'에 실린 글을 수정, 확대하여 다시 작성한 것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