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이여, 제발 '미국병' 좀 고쳐라

우리 사회 문제의 해답은 우리 스스로에서 찾아야

등록 2008.04.07 14:08수정 2008.04.0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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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 유엔창설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자료사진)
2005년 10월 유엔창설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자료사진)오마이뉴스 남소연

"미국에서는 이렇다."
"미국은 이런데, 한국은 어떻다."
(미국을 암시하는 듯한 말투로)"선진국은 이런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여러분은 이런 얘기 종종 들으시지 않습니까? 또는 혹시 자기 스스로 그런 표현을 써본 적 없으신가요? 저는 가끔 그 비슷한 표현을 씁니다. 다만 제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서인지 "한국은 어떠한데, 미국은 안 그렇군"이란 식의 표현을 쓴다는 게 약간의 차이입니다.

귀에 못박힌 "미국 타령"

몇 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지내게 되면서, 미국과 한국이 다른 것들이 어떤 것인지가 눈에 보이고 머리속에 박히더군요. 하지만, 그런 비교하는 버릇만 생긴 게 아니라, 예전에 없던 눈썰미도 하나 생겼습니다.

한국의 언론과 주요 여론 주도층 - 예컨대, 정치인과 유명인사 - 들의 글과 말 속에서 '미국타령'이 엄청 많이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구사하는 단순 '비교'의 차원을 넘어 분명한 '선호'를 나타내고 있음을.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사고엔 엄청난 착각 또는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미국, 또는 미국사회가 택하고 있는 제도와 관습은 당연히 한국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에 관련한 시의적절한 지적이 한 법조인에 의해 최근 제기되었습니다. 지난 3일 서울고등법원 설민수 판사가 내부통신망에 '혜진·예슬법 착상은 전시행정적'이라며 비판한 글이 언론에 노출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보도한 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 판사는 "어떤 일에 대해 대책을 세울 때 제발 미국은 어떻게 한다는 식의 보도에 따른 대책은 안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법을 흉내낸다고 한국이 미국이 되는 것은 아니고, 될 수도 없다"며 "미국법을 조금 깊게 공부해 보면 확실히 느끼지만 미국의 특정제도나 법은 미국이라는 특수국가의 여건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답을 미국에서 얻는 것은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특정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우스운 결과만 낳는다"고 지적했다.

미국 제도는 미국 풍토에 맞게 만들어진 것


저는 설 판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미국의 관습과 제도는 미국이란 사회에서 적합하게 만들어지고 가꿔온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형법체계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회특성 - 광대한 국토, 많은 인구, 다양한 인종구성 그리고 총기소지의 자유 등 - 에 특화되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쓰고 있는 제도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국에 이식하는 게 좋은 걸까요? 설 판사는 그의 기고를 통해 혜진·예슬법 제정 움직임으로 불거진 '미국법 베끼기'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형선고 등의 선고형량 기준 상향조정 및 전자팔찌 같은 위치표시기 착용의 광범위한 적용 움직임 등 '엄벌주의'적 사고에 반대를 표한 것입니다. 유럽과 캐나다 등 미국을 제외한 구미선진국에선 모두 헌법적으로 사형이 폐지된 지 오래이고, 전자팔찌같은 위치추적기 착용이 법제화 되지 않았습니다. 즉, 사형과 전자팔찌는 진정 '미국적'인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선택하고 운용하고 있는 그러한 제도는 과연 선진적인 걸까요?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영어몰입교육에 광분한 바 있는 한국의 여론주도층은 '미국제도=선진문물'의 공식을 정신병자처럼 집착하고 있음은 쉽게 발견됩니다.

근래 시사평론가 진중권씨의 사형제폐지 옹호 주장에 대한 반박의견을 피력한 중앙대 김영봉 교수의 '美·싱가포르는 야만국인가'란 칼럼이말로 그러한 '미국병'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진중권씨가 '싱가포르가 형행의 선진국?'이란 반박기고에서 그런 미국병 환자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잘 논박하고 있기에 저는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

'미국병' 삼단논법

저는 다만, 진중권씨가 이미 '결합의 오류'라고 지적한 미국병 환자의 어처구니 없는 사고구조를 간단한 연역법적 삼단논리로 달리 풀어보고자 합니다.

1. 미국은 선진국이다. (대전제)
2. 사형제(전자팔찌)는 미국에서 쓰는 제도다. (사례적용)
3. 따라서 사형제(전자팔찌)는 선진적인 제도이다. (결론)

다소 작위적으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이런식의 '미국:선진=미국제도:선진문물' 논리는 한국사회, 특히 지식인층에 병적으로 퍼져 있는 신앙이 되고 있음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연역법에 의해 도출된 결론의 진위파악은, 대전제의 신뢰성 여부로서 검증됩니다.

그렇다면, 사형제나 전자팔찌같은 엄벌이 훌륭하고 올바른 제도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그러한 (법)제도를 수립한 미국 또는 미국사회의 건강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수고스럽지 않아도, 법률이 관장하는 범죄와 치안이라는 영역에서 미국사회의 건강성은 심각한 수준으로 위협받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범죄가 통계적으로 집계되는 나라는 대략 70여국 정도 됩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일반 살인발생율 24위, 총기에 의한 살인발생율 8위, 강간발생율 9위에 속합니다(출처: Nationalmaster.com의 미국범죄통계량). 이를 한국이 포함된 OECD 가입국, 즉 선진국가 30개국만으로 추려보면, 미국은 범죄율에 있어 선진국가들 중 각 분야별로 3위, 1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에 비해서는 최소 두 배 이상, 일본에 비해 다섯 배 이상으로 구미 선진국 중 최고의 범죄율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구미선진국 중 '최악의 치안부재'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치안에 관련한 사회안전체계에 있어 최악의 국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각종 범죄에 대한 다양하고 복잡한 법률과 처벌제도가 활짝 꽃핀 사회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제 수입품 vs. 국산품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스타일의 신법(新法) 제정"은 무슨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나라 사회도 곧 미국처럼 흉폭한 범죄가 판을 치는 고범죄율 국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법제도를 수입해 오려는 것일까요?

서울고법 설민수 판사의, '미국을 통해 답의 방향을 찾아보는 것은 도움은 되지만 특정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우스운 결과만 낳는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사회를 비난할 때 언급되는 '우매한 사대주의나 숭미주의'가 우리 사회에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걸핏하면 듣게 되는 고질적 '미국병'은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TV나 컴퓨터를 비롯한 2차산업 제조품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있어서도 국산품이 미제수입품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깨우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국병 #미국타령 #사형제 #전자팔찌 #혜진예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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