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별(Lone Star)'이 그려진 텍사스 주 깃발과 주 경계를 합쳐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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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일한 제국' 미국은 줄곧 국제사회를 무시해 왔다. 교토 의정서 비준 거부, UN 분담금 체납,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유화 등의 예가 그것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다면서도, 안으로는 자국 이기주의에 함몰된 미국의 모습이다. 이는 중국 중화사상에 빗대 가히 '중샘사상(中Sam사상, Uncle Sam은 별무늬 테를 두르고 실크햇을 쓴 키크고 마른 사나이로 미국정부를 상징)'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이런 미국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있기는 하다. 북한·이란·이라크(미국 점령 이전)·베네수엘라·리비아·쿠바 등이다. 이들은 부시의 골프장 카트를 대리운전해 주는 대신 부시를 '악마'라고까지 지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부시 정권에 의해 '악의 축' 낙인을 받거나 '미친 독재 좌파정권' 쯤으로 치부돼 국제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부시에게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국가는 모두 광의의 '악의 축'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시가 참 난처한 일이 생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미국 내에서 그 악의 축이 생겨나고 만 것이다.
"대통령이 주 정부에 명령할 권리 없어"부시의 사형 집행 중단 명령에도 불구하고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는 멕시코 국적 죄수의 사형을 강행하겠다고 나섰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보내면서까지 생각을 바꿔 보려 했지만 주지사는 5일 예정된 조 메들린(33)의 사형 집행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일개 주지사가 미국 최고 통수권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1993년 당시 18세이던 메들린과 그 친구들은 텍사스 휴스턴시 한 공원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소녀 엘리자베스 페나(16)와 제니퍼 어트먼(14)을 집단 윤간하고 잔인하게 목졸라 살해했다. 이듬해 메들린은 사형 선고를 받고 텍사스 교도소에서 지금까지 복역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형사법 제도에서는 간단하게 끝날 것 같던 이 사건이 복잡한 국제 문제가 됐다. 2003년 메들린과 멕시코 정부가 미국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기 때문.
메들린은 비록 어릴 때 이민을 와서 미국 생활과 영어에 능통했지만 사건 당시 국적은 멕시코였다. 메들린의 변호인과 멕시코 정부는 미국 사법당국이 외국인을 체포할 경우 그 사실을 즉각 해당 국가의 외교 기관에 알려야 한다는 1963년 '영사 업무에 관한 비엔나 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세계 각국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ICJ는 멕시코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고 심리 끝에 2004년 메들린을 포함한 미국 내 외국인 사형수 51명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ICJ의 결정에 따라 사형 집행이 임박한 메들린에 대한 집행을 중단하라고, 이전에 자신이 주지사였던 텍사스주 정부에 명령했다.
하지만 릭 페리 주지사는 "텍사스주 정부는 텍사스주 헌법과 법률만 따를 뿐, 연방 정부가 다른 국가와 체결한 어떠한 조약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며 부시의 명령을 일축했다. 지난 3월 미 연방 대법원까지 "부시 대통령이 주 정부 사법 행위에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오직 미 국회가 제정하는 연방 법률에 의해서만 주 정부가 비엔나 협정에 따르도록 할 수 있다"며 텍사스의 손을 들어줬다.
부시가 미국 내 '악의 축'에게 단단히 한 방 먹는 순간이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몇몇 연방 하원의원들이 주 정부가 국제조약을 따르도록 강제하기 위한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메들린의 사형 집행이 중단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