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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종업. 드디어 학년이 완전히 끝납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도 이 교실에서는 마지막입니다. 올 해 열 살이 된 저 아이들은 이제 3학년이 되고 전 전근을 갑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끔은 억지로라도 시간을 며칠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소풍가기 전 날, 첫 데이트하기 전 날, 결혼하기 전 날,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것으로 월급을 받아 밥먹고 사는 일은 같은데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다 보니 학기말이 되면 꼭 이렇게 유치한 감정에 말려듭니다.
“그래, 너희들 3학년 되는 거 되게 좋구나? 선생님도 금세 까먹고 새 학년 새 교실 가서 재미있게 잘 놀아라, 흥!”
통하지도 않을 심술을 장난삼아 부려봤는데 저 녀석들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미안해하는 표정이군요. 사람이니까, 만나고 헤어짐의 정리(定離)를 아는 사람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요.
“얘들아, 우리 올 한 해 동안 선생님이 찍었던 사진들 구경할까?”
마침 날도 적당히 흐리고 비도 오는 오늘, 불을 끄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다 함께 심호흡을 길게 한 번 더 하고 잠시 눈을 감고 말을 멈추었다가 스크린을 내리고 프로젝터를 켭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의 느린 악장. 흐느끼듯, 그러나 결코 천박하지는 않은 장엄한 톤의 현악기가 무거운 주제를 이끌어 나가면 붉은 단풍처럼 단아한 하프가 뒤따르는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그동안 학급 카페에 올려 놓았던 사진을 내려 받아 미리 동영상으로 만들어 놓은 슬라이드가 한 장씩 넘어 갑니다.
3월, 첫 만남 때의 보얗고 어색한 얼굴에 두꺼운 점퍼를 입었던 교실풍경부터 같이 교실 뒷면에 그림을 붙이던 모습, 정글짐에 매달리던 모습, 장마때 모래밭에서 흙장난하던 모습, 도토리 팽이 만들던 모습들과 실내화 신고 운동장 나가 놀다가 벌로 복도를 닦던 모습, 친구와 싸우고 나란히 벌 서던 모습, 교실에서 뛰다가 기타 부러뜨린 사진도 있고 운동회 때 인디언 분장하고 춤추던 모습, 친구의 앞니 빼던 모습, 눈 사람 만들던 사진, 사진, 사진….
한 해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긴, 그 사이에 키도 자라고 몸무게도 늘고, 말도 늘고, 꾀도 늘었지요.
“와, 그러고 보니 일년 동안 일이 참 많았다. 그치?”
“…….”
몇 명이 전학을 가고 또 몇 명이 전학을 오는 동안 다치거나 아픈 아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도 기적이다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닥치는 일상의 분주함과 긴박함에 비한다면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아이들이 꽉찬 콩나물처럼 든든히 자라는 동안 나만 그대로 있었구나.
음악은 아쉬움을 몰아 절정으로 향하고 아이들은 저마다 화면을 보면서 각자 지내 온 한 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전 교실 뒤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어눌하던 표정이 학기말에 가서 완전히 펴진 아이도 있었지만 또 여전히 어색한 아이도 있고 한 해가 너무 빨리 지나 서운하다는 아이가 있는 반면 어서 다음 학년으로 가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 아이들의 성장에 제가 어떤 이정표가 되고자 했든 안했든 제 욕심은 그저 욕심일 뿐,
아이들은 그저 주어진 삶을 담담히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가겠지요. 아이의 최종 삶을 결정하는 건 앞으로 아이가 살면서 만나게 수많은 선택일테니 그 선택에서 보다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래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자라온 시기도 갈림길이 참 많았는데. 어떻게 운이 좋아 지금까지 잘 살아 온 것이 참 다행이다 생각하는 동안 아이들의 한 해 순간순간을 수백의 일초로 얄밉게 포착한 사진 슬라이드가 끝났습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2학년이 재밌었던 친구도 있겠지만 반대로 힘들었던 친구들도 있을 거야. 그 친구들은 다른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2학년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 친구들에게 미안해.“
“…….”
“또 있어. 선생님이 너희들을 좀 더 엄격하게 공부시키길 바라셨던 엄마들도 많이 계셔. 그 엄마들께도 미안해. 선생님은 엄마들 생각이 옳은 걸 알면서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어. 앞으로 너희들이 공부를 못하면 그건 내 책임이야. 너희들은 그걸 잊으면 안돼.“
겨우 갓 열 살이 된 아이들이 잘 이해하지도 못할 당부를 하면서 꼬물꼬물하던 아이들과의 한 해는 이렇게 끝납니다. 며칠 지나면 아이들은 새학년, 새 출발이라는 축하를 받으며 3학년이 되겠고 전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겠지요.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아이들은 그런 과정을 거듭하며 어른이 될테고 저 또한 그렇게 먹고 살겠지요. 그렇게 보면 꽃이 피고 다시 지고 또 피는 것처럼 당연한 일상일 뿐인데 오늘은 왜 기분이 이리 착 가라앉느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2009.02.13 19:5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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