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없는 학교를 위하여

전교조 교사와 보낸 내 아이들의 다정한 추억

등록 2009.06.02 13:49수정 2009.06.0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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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들한테 이런 유언을 했어."

 

내 바로 옆 술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가 직접 하는 말이기에 나는 그 유언이라는 것을 죽을 때 하는 유언이 아니라 그 정도로 꼭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정도로 이해했다.

 

"절대 월급쟁이 하지 마라."

 

월급쟁이가 대다수이고 나 역시 월급쟁이 생활을 주로 한 사람이기에 선배의 그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 선배가 살아온 인생을 대출 되새겨 보았다. 학창 시절에 부모 속을 많이 썩였다고는 하지만 대학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을 다녔고 제법 잘 나가는 사업을 하다 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상담과 강의활동을 주로 한다. 사회 초기 경험은 잘 모르지만 직장생활은 그때 잠시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월급쟁이 하지 말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선배가 말하는 강조점은 그런 능력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월급쟁이는 인생을 담보 잡히고 할부로 사는 인생이야."

 

'담보'와 '할부'. 대다수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월급쟁이 인생을 확 까발리는 표현에 나는 정신이 번쩍 뜨였다. 담보와 할부가 빚과 관련된 말이고 빚이란 게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이란 걸 재무상담을 통해 익히 아는 내게 선배의 비유는 피부에 와 닿는 표현이었다. 그 이후로 선배는 아이들 얘기를 계속 했다. 온 가족이 컴퓨터 게임과 만화를 함께 즐긴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들은 이런 농담도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문제아는 없고 '문제어른'만 있어요."

 

이런 얘기를 아는 사람들한테 하면 아이들이 어디 다니느냐고 꼭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얘기를 해주면 반응이 썰렁해진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말이 안 먹힌다는 것이다. 얘기 중에 아들은 재수하고 있다고 말해서 알았지만 딸에 대해서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남들처럼 아이의 학교 이름이나 성적으로 선배 얘기를 평가할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 어린시절의 폭력 경험과 전교조

 

좋은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느낌 감흥은 오래 간다. 강요된 지식이나 지침이 아니라 느낌으로 와 닿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보다는 어울리는 게 먼저다.

 

자녀와 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강요된 정답(?)의 폐해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학교에서는 군사정권과 산업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학생들의 꿈은 고려되지 않았다. 가정에서도 거의 비슷했다.

 

20년 전 전교조가 학교에서 참교육의 깃발을 들어 학교를 바꾸기 시작했다. 80년대 민주화 세례를 받은 지금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개성과 꿈을 키워주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고 이뤄야 할 꿈은 많기만 하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전교조 교사들의 혜택을 듬뿍 받고 잘 자라주었다. 내가 도시에서 강화 농촌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자녀 교육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는 그때 막 알기 시작한 전교조 교사가 있었다. 한 학년 학생이 스무 명 남짓한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는 전교조 교사 몇 명으로도 충분히 좋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교사는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결손가정 아이들을 방과 후에 교실에 남겨두고 자상하게 가르쳤다. 동네 아이들을 자신의 집이나 마을회관에 모아놓고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쳤다. 후배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 어린이날 행사를 재밌게 꾸리기도 했다. 강화에 있는 전교조 교사들이 자기 학교의 결손가정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놀았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보다 어려운 아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웠다.

 

학교 가까이 있는 복지시설에 사는 아이들이 전교생의 30% 정도를 차지해서 학교 분위기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전교조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아무 탈 없이 아이들이 자랄 수 있었다. 둘째 아이의 담임이었던 전교조 교사는 방학 때 아이들과 함께 캠프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집에 아이들을 초대해 재우기도 했다. 전교조가 없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런 선생들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줄곧 1등을 했다. 그렇지만 해마다 한 차례씩 담임이나 이웃 담임에게 지금도 기억날 만큼 엄청 맞는 일을 겪었다. 다만 5학년 때만 그런 일이 없었다. 허름한 우리 집에 가정방문을 와서 차린 것 없는 저녁을 먹고 가셨다.

 

어린 내게 그 장면은 오랫동안 인상에 남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에게 '담임'은 부잣집 아이들만 상대하고 늘 촌지만 바라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담임은 나중에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나는 가고 싶었지만 버스비가 없어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선생 가운데 오직 그 선생의 성함만 지금도 기억난다. 정태헌 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늘 1등을 하던 나도 때렸다. 그 선생의 기준은 점수가 높은지 낮은지가 아니라 전보다 올랐는가 떨어졌는가였다. 참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맞아도 나는 결코 억울하지 않았다. 겨울방학 때는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서 우리와 축구를 하곤 했다. 결혼식 때 마땅한 주례 선생을 구할 수 없던 내게 유일하게 떠오른 은사였다.

 

어른부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군대에서 폭력을 당한 신병들이 고참이 되어 다시 신참을 때리는 악순환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폭력에 순응시켜온 한국 사회다. 그러나 그런 폭력을 당하면서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얘기도 종종 듣는다.

 

그런 것처럼 나도 학교 다닐 때 맞은 기억을 할 때마다 절대 그렇게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부천에서 좋은 전교조 선생을 찾아 강화 농촌으로 이사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은 정말 맑게 잘 자라주었다.

 

나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폭력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세상이 지시와 복종이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과거에도 폭력은 당연히 없었어야 했지만 지금은 더욱 더 가정과 학교에서 바뀐 세상에 맞는 비폭력 교육을 해야 한다.

 

여기서 폭력은 꼭 물리적 폭력만은 아니다. 욕설과 왕따를 비롯한 것들도 다 폭력이다. 개인의 의지에 반해 강제로 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어른인 우리 부모와 교사들이 우리 삶부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아이들에게도 폭력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른들부터 늘 반성하고 고칠 건 고쳐야 할 것이다.

2009.06.02 13:49ⓒ 2009 OhmyNews
#폭력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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