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23시 40분에 출발하는 심야 우등고속버스를 올라타고 김해를 향해 달렸다. 고속버스가 달리는 내내 울컥임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참여정부에서 홍보수석을 맡았던 조기숙 전 홍보수석의 <마법에 걸린 나라>를 읽어 내려가며, 일반 국민으로써 당시 볼 수 없었던 청와대 내부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며 웃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냥 있는 그대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언론들의 못된 습성, 쉽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긁어버리는 그들의 필대에 많은 국민들이 속고, 마치 몇몇 언론이 긁어내린 이야기가 사실인양 받아져서 국민의 여론이 오해를 하던 시기.. 그 시기가 지났다. 그러나 벗어지지 못했던 사실에 약간의 분이 쌓여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퇴임 후 자연인 노무현으로 돌아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그것을 승리인양 자축했던 몇몇 언론들과 정치세력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시샘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시기 받는 마음 그 마음도 평치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새벽 4시 30분 즈음 고속버스가 한밤을 달려 김해에 도착했을 때 혼자만 내릴 줄 알았던 고속버스에서 6~7명의 사람들이 같이 내렸다. "저 사람들은 어딜 가는 걸까?" 혼자만의 질문을 던진 뒤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릴 찾았다. 편의점에도 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 역시도 밤을 꼬박 새우며 어디선가 김해를 향해 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허기를 달래고, 첫차를 기다리는데 그 자리에 모두 모이게 됐다. 진영을 향하는 첫차가 오자 모두 한 차량에 올라탔다. 그때까지 만해도 그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님의 49재에 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
진영읍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사람들 모두가 버스에서 내려 안내 간판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다 서로가 같은 방향임을 안 사람들은 미소를 띠고 서로 목례를 나눈다. 필자는 몇 번 내려와 본적 있었던 터라 콜택시를 부르기 전 사람들에게 "혹시 봉하마을 가세요?"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안내 표지판을 들여다보던 사람들 모두가 "예"라는 답을 했다.
두말 할 것 없이 택시를 불렀고, 금세 온 택시에 모두가 동행인양 타고 봉하로 출발했다.
새벽 5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는데도 이미 봉하마을엔 약 800여 명의 노사모 회원들이 자원봉사단을 꾸렸고, 안장식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자원봉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봉하에 도착한 필자는 자원봉사 센터에 가방을 내려놓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모셔져 있는 정토원을 향해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 했다. 약 3Km를 걸어 정토원에 도착해서 참배를 하려했지만... 필자가 많은 사람들보다 늦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밤새 노무현 대통령의 49재를 위한 참배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던 터였다.
한쪽에 줄을 서고, 사람들의 차례를 기다리다 흐느껴 우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마음이 심란해져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필자 나름의 마음다짐이 있어 절대 눈물은 흘리지 말자라고 다짐했건만 그 다짐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마음, 그 마음이 한 순간 사람들의 흐느낌과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는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참배를 새벽녘 참배를 마치고 사저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줄담배를 연신 피우며 쓰린 속에 올라오는 억울함 감정,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때쯤, 한 사람이 뒤쪽에서 필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해서 쳐다보니, 함께 농활에 참여했던 사람이 사는 세상 회원님이셨다. 붉어진 눈에 얼룩진 얼굴을 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끌어안고 바위 위에서 두 사람은 울고 말았다. 그렇게 10분 가량 통곡 아닌 통곡을 하고난 후에야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눴고, 다른 회원님들께서 필자가 온 것을 알았는지 찾아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다른 회원님들과 만나 인사를 하고 하염없이 서로 끌어안고 울고, 울었다.
시간이 8시가 되어갈 즈음 인산인해를 이루던 정토원이 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조계종 주지스님과 정치인들이 도착하고 49재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탓이기도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대형을 짜서 권여사님과 가족들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나름의 경호를 위한 동선을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가 한 몸인양 일사불란하게 움직임을 계속했다.
취재 팀들이 도착하고 포토라인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9시부터 시작된 49재는 모두가 눈물바다를 이룬 채 진행되었다. 통곡하시는 분들, 그리고 분노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모두가 노무현 대통령의 49재를 함께 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영해가 담긴 분골함을 들고 건호씨가 눈물을 참아가며 영구차로 향했다.
건호 씨와의 눈 맞춤 그리고 서로가 참지 못한 눈물을 또다시 그 자리에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의 노무현 대통령님의 가시는 길 양측에 서서 권 여사님과 건호씨의 운구행렬을 지켜본 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서로 어떤 약속이라도 한 듯 질서정연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분골함이 영구차에 오르자 또다시 모여 있던 사람들의 통곡과 한스러운 외침이 계속되었다. 안장식이 준비된 곳까지 기필코 따르겠다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운구차 행령을 뒤따랐고, 안장식이 열리는 곳까지 걸어서 운구행렬을 뒤따랐다.
안장식이 거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안장식이 거행되는 동안 모두가 하나인 듯 움직였다. 모두가 함께하는 안장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장식순이 모두 끝나고 참배객들은 삼삼오오 노무현 대통령께서 안장된 곳에 모여들어 순서를 지키며 참배를 마친 후 봉하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49재, 그 안에서 각개인 모두는 움직임을 같이 했다. 누가 시키지도 누가 계획하지도 않았음에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모두가 하나인 듯 움직이는 일사불란함.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님을 지키던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러한 모습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힘이기도 했다.
2009.07.11 19:5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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