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넘게 영화 마니아로 살아온 할아버지의 DVD플레이어. 한가한 시간엔 영화 한 편 보며 호떡을 굽기도 한다.
김소연
스스로 영화 마니아라고 말하는 이 할아버지의 트럭에는 DVD 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다. 손님이 뜸해 한가로울 때면 호떡을 구우며 영화를 감상한다. 60년 넘게 보아 온 영화다.
"어려서 아버지 손 붙잡고 영화관 따라다니던 시절부터 영화가 좋았어. 6.25 후엔 영화관이 많이 생겨나서 그때부터 이때껏 영화를 취미 삼았지요."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이 싫어서 애정 영화는 보지 않는다. 무협 액션이나 공포물, 기록 영화 등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기록 영화다. 하지만 한국 역사 기록 영화들은 화질도 떨어지고 좋은 척 포장하는 경우가 많아 거의 구입하지 않았다. "조금 부끄러워도 사실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말이야"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영화를 묻자 이 할아버지는 1926년에 제작된 나운규의 <아리랑> 이야기를 꺼냈다. 필름은 물론 시나리오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전설의 무성영화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변사가 나와서 얘기해 주는 영화가 정말 재밌었지. 가끔 변사 따로, 음악 따로인 경우도 있어. 그럼 완전히 공연을 망치는 거야. 사실은 그것도 재미지." 종로 4가와 5가 사이 제일극장을 포함한 그 근방 극장들에서는 국악이나 판소리를 주로 공연했고,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에선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는 인간 문화재 이은관옹의 배뱅이굿을 부민관에서 보았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졌고 부민관 폭파사건 주인공이기도 했던 이 건물은 광복 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였으며, 지금은 서울시 시의회 의사당으로 쓰인다. 할아버지의 설명에 세월이 진하게 묻어난다.
돈도 그렇다. 영화 한 편에 10원 정도 하던 때가 있었다는데 지금 영화 한 편 가격을 생각하면 그 사이 화폐 가치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이 난다.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TV가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냉큼 사버렸어. 남의 집 셋방을 살았지만 우리 집엔 TV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늘 바글거렸지."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일까? 할아버지의 표정엔 예민함이 없다.
"이젠 늙어서 제목이나 내용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해. 또 기억할 필요도 없고"라고 말하면서도 <마부> 영화 촬영장 구경하던 일, 존 웨인 영화를 좋아한 얘기, 6편 모두를 간직하고 있다는 히말라야 <차마고도> 이야기 등, 그의 영화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이렇듯 평생 영화를 즐겨온 그에게는 영화 외에도 30년 넘게 즐겨온 여가가 있는데, 그것은 여행이다.
찬찬히 음미하는 여행, "밥 한 덩이에 소금만 찍어 먹어도 꿀맛이야"8살, 6살 어린 아이들을 두고 아내가 세상을 등진 후, 할아버지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산행에 취미를 붙였다. 자녀들이 장성한 후론 호떡을 팔지 않는 여름 내내 여행을 다닌다. 트럭에 이불과 버너, 쌀을 싣고 정처 없이 떠나 한 장소에서 며칠씩, 때론 한 달 이상 머무르기도 한다. 차를 장만하기 전엔 오토바이에 텐트를 싣고 떠났고, 그마저 없을 땐 밤기차로 떠나 여행을 했었다고 한다.
"여행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못할 것도 없지요. 밥 한 덩이에 소금만 찍어 먹어도 그 맛이 꿀맛이야. 오히려 배가 고파야 구경도 제대로 할 수 있지."요즘 실물 경기가 IMF때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채워줄 즐거움 한 조각은 가지는 게 좋다는 이신일 할아버지, 그는 홀로 가는 여행 중에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과 동행하며 친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