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의 모습.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
김아람
구텁지근한 땀 냄새를 풍기며 걸은 지 10km도 지나서 만난 동네 개울에는 역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효돈천으로 기억되는데 노는 사람들은 아이들이었다. 족히 열 살은 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말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광경이었다! 실수를 한 것이다. 그 곳을 지나며 일행과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여자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꽤나 기분이 나빴을 것 같다.
내가 신기해 하는, 맑다고 감탄하는 그 곳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올레가 걷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에서 그쳐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예전에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서 마음껏 목욕하고 물장구를 쳐도 되었었는데 올레길이 되고 나서 지나는 사람이 늘고 나처럼 고개 돌려 쳐다보는 여자도 있으니 말이다. 제주 사람들이 느끼기에 올레가 외지인들이 마을 구석까지 오게 되는 귀찮은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을 사람들이 열어 놓은 대문을 닫아야 되거나 앞마당에 널어놓은 속옷 빨래를 신경 쓰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한편, 제주 사람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켜켜이 담고 있는 곳은 우리가 셋째 날에 갔던 송악산 일대이다. 올레 코스로는 10코스(화순~모슬포), 11코스(모슬포~무릉)에 해당한다. 올레 11코스에는 백조일손묘 표지판이 있다. 백조일손묘 자체는 코스에 속해 있지 않지만 같은 코스의 섯알오름을 가기 전에 꼭 들러볼 만하다. 섯알오름에서 탄약고가 있던 자리는 1930~40년대 일본의 아시아 지역 침략과 한국전쟁 후 학살의 역사가 겹쳐 있는 곳이다.
일본이 미국의 일본 본토 진입을 차단하고자 하는 작전(결7호 작전) 수행을 위해 제주도의 모슬포 일대를 진지로 삼았고, 알뜨르비행장 옆의 섯알오름 지하에 탄약고를 두었던 것이다. 일본 패전 후 미국은 이곳을 폭파시켰고 탄약고가 구덩이로 변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상을 의심받아 '예비검속자'였던 210여 명의 제주도민이 사살되었다.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구덩이가 독립 후에는 대한민국의 옷을 입고 있는 군인이 대한민국 국민을 죽이는데 적극 활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