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람과 역사를 보듬는 올레길이 되길 바라면서

[통통통(通統筒)의 역사산책 (16)] 길따라 역사따라 ⓛ

등록 2010.09.11 17:01수정 2010.09.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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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의 제주는 무척이나 더웠다. 제주를 걸어보자고 결정한 우리에게 폭염주의보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제주를 두 발로 걸어서 보고,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한 모양이다. 이들은 '올레꾼'이라고 불리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코스별 각 지점마다 도장을 찍을 수 있는 '패스포트'도 있다. 허나 우리 일행처럼 그저 하루 이틀 걸어보고자 한 사람들은 '올레꾼'이라 이름 붙여지는 게 부담스럽다. 쉬엄쉬엄 걷다가 쉬다가 하려던 사람은 올레꾼의 이름을 지니고 한 코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는 것이 반갑지 않다. 그 목표가 지나치면 올레길 모든 코스를 걷는 게 히말라야 14좌 완등처럼 중대한 과업이 될지도 모른다.

올레꾼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제주의 길을 걷고 싶었던 우리는 첫 날 해안가로 이어진 5코스를, 둘째 날 중산간으로 올랐다 내려오는 7-1코스를 택했다. 제주올레는 2007년 9월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의 코스가 개장된 지 3년만인 올해 6월 추자도를 걷는 18-1 코스까지 열렸으니 올레는 곧 제주도 한 바퀴를 휘감을 수 있겠다.

제주도에서의 올레 바람은 올레를 다녀온 사람들의 책을 통해 전국으로 불고 있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열독했던 선행자의 경험담은 설렘을 더하게 했지만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했다. 함께 걸은 사람들과의 일화, 도시에서 보냈던 일상과의 대비, 누구를 만나서 겪었던 일들이 그러하다. 물론 걷는 것은 개인적이며 외로우며 홀로 사색하게 한다. 올레 관련 책들 중간 중간의 곁들여진 시도 그것을 도우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올레는 다름 아닌 '제주'올레가 아닌가.

왜 제주도를 걷는 것은 다른 어떤 곳을 걷는 것과 다른가. 바다와 오름이 만들어내는 수려한 풍광, 겨울에도 0도 이상을 유지하는 따뜻한 기후, 화산이 낳은 독특한 지형이 답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올레를 걷는 사람이 제주의 자연을 보고 걸으며 느끼고 감탄하고 쉴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제주의 역사는 '제주올레'에서 그 자리가 너무도 비좁다.

우리 일행이 갔던 5코스는 절벽 산책로를 지나 해안도로,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차를 타고 다녀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비경(秘境)도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제주 사람들이 있는 그 곳이었다. 그 곳인즉슨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곳에 용천수가 솟아나서 바닷가에 목욕탕이 만들어져 있는 곳! 여탕의 영업(?)은 중단된 것을 보고 남탕을 들여다보려고 다가갔다가 남자 일행들에게 곧바로 저지당했다.

우리가 아는 노천탕은 반드시 수영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넙빌레의 여름목욕탕은 다르다.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이용할 수 있는 그 곳에서 옷을 입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청청한 물 속에서 더위를 식히는 남정네들을 보니 여탕이 영업중이었으면 풍덩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여탕의 모습.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
여탕의 모습.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김아람

구텁지근한 땀 냄새를 풍기며 걸은 지 10km도 지나서 만난 동네 개울에는 역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효돈천으로 기억되는데 노는 사람들은 아이들이었다. 족히 열 살은 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말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광경이었다! 실수를 한 것이다. 그 곳을 지나며 일행과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여자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꽤나 기분이 나빴을 것 같다.

내가 신기해 하는, 맑다고 감탄하는 그 곳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올레가 걷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에서 그쳐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예전에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서 마음껏 목욕하고 물장구를 쳐도 되었었는데 올레길이 되고 나서 지나는 사람이 늘고 나처럼 고개 돌려 쳐다보는 여자도 있으니 말이다. 제주 사람들이 느끼기에 올레가 외지인들이 마을 구석까지 오게 되는 귀찮은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을 사람들이 열어 놓은 대문을 닫아야 되거나 앞마당에 널어놓은 속옷 빨래를 신경 쓰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한편, 제주 사람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켜켜이 담고 있는 곳은 우리가 셋째 날에 갔던 송악산 일대이다. 올레 코스로는 10코스(화순~모슬포), 11코스(모슬포~무릉)에 해당한다. 올레 11코스에는 백조일손묘 표지판이 있다. 백조일손묘 자체는 코스에 속해 있지 않지만 같은 코스의 섯알오름을 가기 전에 꼭 들러볼 만하다. 섯알오름에서 탄약고가 있던 자리는 1930~40년대 일본의 아시아 지역 침략과 한국전쟁 후 학살의 역사가 겹쳐 있는 곳이다.

일본이 미국의 일본 본토 진입을 차단하고자 하는 작전(결7호 작전) 수행을 위해 제주도의 모슬포 일대를 진지로 삼았고, 알뜨르비행장 옆의 섯알오름 지하에 탄약고를 두었던 것이다. 일본 패전 후 미국은 이곳을 폭파시켰고 탄약고가 구덩이로 변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상을 의심받아 '예비검속자'였던 210여 명의 제주도민이 사살되었다.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구덩이가 독립 후에는 대한민국의 옷을 입고 있는 군인이 대한민국 국민을 죽이는데 적극 활용되었던 것이다.

  섯알오름 탄약고 자리의 학살 현장. 2001년 2월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과 유물들을 재발굴하면서 큰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다. 2007년에 제주도 정부에서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 곳을 정비하였다.
섯알오름 탄약고 자리의 학살 현장. 2001년 2월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과 유물들을 재발굴하면서 큰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다. 2007년에 제주도 정부에서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 곳을 정비하였다. 김아람

이렇게 학살된 사람들 중 132명의 시신을 안치한 곳이 '백조일손지지'이다. 학살 후 6년만인 1957년에야 시신을 수습하여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백 명의 조상이 있지만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는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묘가 황망하게만 느껴진다.

묘지가 만들어지고 나서도 5.16군사정권에서는 묘비를 파괴하는 등 방해를 일삼았었는데, 근래에도 이들 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기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조일손묘 옆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입구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그것이다.

 '백조일손' 위령비. 비석 위의 국기는 대한민국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백조일손' 위령비. 비석 위의 국기는 대한민국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김아람

 '6.25'전쟁 전사자 충혼비
'6.25'전쟁 전사자 충혼비김아람

한국전쟁 당시 싸운 호국용사를 기리기 위한 '충혼비'였다. 1955년에 세워진 이 비석 자체를 문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1999년에 그것을 하필 백조일손묘 옆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또한 백조일손묘가 유족회의 관리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에, 충혼비는 2003년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음도 곱씹어 볼 만하다.

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가까운 두 곳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역사를 두고 두 기억과 기념이 경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스스로 가해한 국민에게 무신경하면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만 있어서 씁쓸하다.

제주올레는 걷고 싶은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올레가 담고 있는, 올레를 찾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 속에 제주 사람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으며 과거에 그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대한민국의 국가폭력을 격하게 겪어내기도 했다.

제주올레가 더욱 제주 사람의 삶을 지켜주고 그들이 안고 있는 제주 역사를 공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올레길과 전시체제 경험이나 4·3 항쟁 당시 잃어버린 마을, 학살터 등을 연결하는 올레길을 닦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또한 올레길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걷게 되는 때에도 제주 사람들의 입장과 참여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올해 11월 9일부터 13일까지 열릴 올레 축제에서는 걷는 사람의 마음이 제주 자연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과 역사에도 기울여지길 희망한다. 그렇게 된다면 제주올레는 제주 천혜의 자연, 제주 사람의 삶과 역사, 걷는 사람의 감동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모토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통통통 회원인 기자는 앞으로 걸으면서 몸소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 글은 그 첫번 째로 제주의 올레길과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통통통 회원인 기자는 앞으로 걸으면서 몸소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 글은 그 첫번 째로 제주의 올레길과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제주 올레 #섯알오름 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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