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
장다혜
나중에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꿈 같았어."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한준이가 조금 술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또 집 앞으로 나를 찾아 왔습니다.
"나랑 딱 한 잔만 하자.""밤중이라 오래는 못 있어, 멀리 가지도 못하고.""요 앞에서 한 잔 만 해. 학현아 부탁이다."나는 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하는 생각에 집에서 가까운 술집에 한준이를 따라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술집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좁은 찻집처럼 생긴 술집 안은 몇 개의 탁자와 의자가 기차의자처럼 배열되어 있었고 플라스틱 잎파리가 벽을 조악하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한준이는 이미 한 차례 술을 한 탓이었는지 조금 더 취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내 발은 항상 차가웠는데 발이 시려워 왔습니다.
"나 발 시려워, 이제 그만 가자."한준이는 갑자기 양말을 벗더니 내 발을 자기 무릎에 얹어놓고는 한짝씩 자기 양말을 신겨주었습니다.
"난 이제 널 위해 살거야. 제발 아프지 좀 마라. 그리고 오늘 밤 우린 선을 넘는거야. 알았지? 여기서 마시고 나가서 오늘 들어가지 말자."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나 그만 갈게 다음에 만나."내가 일어서자 한준이가 나를 억지로 끌어다 앉혔습니다. 한준이는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여서 나를 막무가내로 붙잡았습니다.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 하고 카운터에서 종이와 볼펜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는 글을 적어 카운터로 갔다 주었습니다. 다행히 형부가 휴가를 나와 우리 집에 온 날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형부와 언니가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형부!"나는 형부를 보자 울먹이며 일어섰고 한준이가 또 나를 붙잡아 앉혔습니다. 형부가 그런 한준이에게 한방의 펀치를 날리자 한준이가 그대로 휘청하며 의자위에 주저 앉았고 형부는 내 손을 붙잡고 집 쪽으로 마구 뛰었습니다.
"토껴! 토껴!"형부는 아마 내가 납치라도 된 것 인줄 알았나봅니다. 언니가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토끼긴 뭘 토껴! 재 우리집 다 알아. 학현이 너 밤중에 술집을 왜 따라갔어."형부도 나를 질책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자면서 몇 번이고 가위에 눌렸습니다. 꿈 속에서 어떤 남자가 나를 억지로 강탈하려는 꿈을 꾸었고 그날부터 나는 밤이면 꼼짝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한준이가 찾아올까봐 겁이 났습니다. 다행히 한준이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남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을 넘자'던 한준이의 말이 끔찍하게 자꾸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자 언니가 '자기 최면술'이란 책을 사다 주었습니다. 끄덕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바깥출입을 꺼리던 내게 그 책은 조금씩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리 옆집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준이가 우편물을 배달하러 왔습니다. 우연히 창밖을 내다봤는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방위복을 입은 한준이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고 삐죽히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한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서 가버렸습니다. 그는 방위병이 되어 있었고 그 후로 나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두려움도 사라져 갔습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아이와 불장난을 한 것입니다. 사랑도 아니었고 탈출구가 없던 내게 한준이는 한때 나의 탈출구였고 나를 어른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첫 키스를 한 아이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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