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을 팔아 받은 돈... 짐처럼 느껴졌어요"

[인터뷰] 한마음혈액원 김명희 혈액안전국장... "기증자중심의 헌혈문화 필요"

등록 2011.11.14 21:10수정 2011.11.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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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혈액원 혈액안전국장 김명희씨 ⓒ 김명희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나눔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그 중에서도 자기 몸속의 일부인 '혈액'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은 진정 마음이 뜨거운 사람일 것이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고 헌혈에 관한 일을 20여 년간 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한마음혈액원 혈액안전국장 김명희(51)씨다. 그녀는 지난 6월 충북대 헌혈의 집에서 헌혈자가 헌혈 후 쓰러지면서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고에 대해 한마디 했다.


"의학적으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혈액원이 헌혈자에 대해 헌혈사고가 최소화 되도록 최선을 다했는지는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과연 혈액원이, 그 사람이 헌혈을 하기에 적절한 사람이었는지, 헌혈을 하는 동안 제대로 그 사람을 보살폈는지, 그리고 헌혈을 한 후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짚어봐야 되죠. 그럼에도 그런 사고가 났다면 안타깝지만 불가항력적 사고여서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망했다 안했다 이전에 혈액원이 헌혈자들에게 해주어야만 될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 되짚어보고, 죽었다는 사실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단계 발전하고 변화하는 계기로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의사인 그녀가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일하다

김명희씨는 어렸을 때 의사가 꿈이었다. 여성으로서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한 것이 의사라고 생각했다. 1986년에 의사 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의사가 병원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어서 좋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며 죽는 환자들을 보며 인생의 어둡고 슬픈 면만 봤다고 했다. 그래서 의사라는 면허증은 안정적인 직업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은 아니라고 했다.

남편은 레지던트, 그녀는 인턴 때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바로 생기지 않아 마취과 레지던트를 밟았다. 마취과에서 일을 하다가 결혼한 지 4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임신을 한 몸으로 마취과 일을 하려니 너무 고되어, 아는 후배의 소개로 1991년도에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에 들어갔다.


"명색이 의사인데, 적십자사 혈액원에 들어가는 첫날 처음으로 헌혈하는 모습을 봤어요. 아! 내가 수술방에서 쓰던 혈액이 사람의 몸속에서 나온 거구나. 어떻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과 무지스러움이 들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에 대한 적십자 혈액원에서의 어떤 배려라든지, 어떤 보살핌이 너무 안 되어 있고, 그 안에 너무나 많은 모순이 있고, 해결해야 될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고도 적십자사 혈액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감정이 북받친다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헌혈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가사 실습시간에 씽크대 위에서 하고, 체육관에 매트를 깔아놓고 하기도 하고, 도서실에 가서 도서실 책상에서 하기도 했어요. 옛날에는 난방이 안되서 석유, 풍로, 난로를 들고 가서 헌혈을 했는데, 그 냄새 때문에 속이 미식거렸어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자비로 외국에 가서 공부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헌혈하는 것이 헌혈자 중심이 아니라 환자중심, 병원중심으로 되어 있고, 혈액사업이 혈액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애들, 까까머리 신병 애들의 혈액을 받아 팔아서 만든 그 돈으로 월급을 받는데, 내가 정말 저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가. 내가 저 사람들을 위해서 그 돈만큼의 가치를 하고 있는 건가, 너무 짐스러웠어요. 계속해서 거기에 있으면 내가 타협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서 10년 되는 해에 사표를 냈어요."

안경너머 눈시울이 젖어있는 그녀에게서,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걸 느꼈다.

민간 혈액원인 한마음혈액원을 설립하다

1999년에 혈액관리법이 개정되면서 헌혈을 받는 것은 대한적십자사에서만 해야 한다는 명시조항이 없어졌고, 혈액원이 신고제가 됐다. 민간혈액원을 만들려고 하는 가운데, 김명희씨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잠깐 일하다가 자신의 말로는 '운명'이라고 말한, '천주교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서 생명운동 부장으로 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낙태반대운동, 배아복제반대운동, 장기기증운동, 시신기증운동에 관한 일을 했다. 모르는 분야에 공부를 하게 되면서, 황우석씨를 반대하는 것에 3년 동안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열정만 있지 처세는 없었던 것 같아요. 황우석씨는 훌륭한 게, 그런 걸 잘하는 거에요. 처세술이 되게 중요하더라구요.(웃음) '황우석씨 덕분에 생명윤리 박사학위를 갖게 된 건지도 몰라요. 만약에 그럴 필요가 없었으면 안했겠죠. 못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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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를 대상으로 헌혈홍보대사학교 진행 ⓒ 한마음혈액원


그동안 준비해오던 한마음혈액원이 2002년에 설립되었고, 2004년에 '생명윤리안전에관한 법률'이 황우석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입법이 되자, 실망을 하고 보따리를 싸서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간 지 한 달 만에 차가 완전히 찌그러지는 대형 교통사고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불안해해서 다시 한국에 왔다. 마침, 이화여자대학교에 생명윤리 정책연구소가 생겨서 연구교수가 되었다. 2006년에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파업을 하게 되고, 2007년에 정부가 한마음혈액원에 지원금을 주게 되면서, 국고가 투입된 '헌혈카페'가 생기기 시작했다. 2009년에 한마음혈액원이 커지면서 헌혈카페도 많아지고, 그 해 그녀는 정식으로 입사를 했다.

"헌혈을 실천하는 일은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한마음혈액원은 올해 17만명의 혈액을 받을 것 같다고 한다. 2002년 첫해 5000여 명에 비하면, 9년 만에 거의 34배가 된 것이다. 한마음혈액원이 주로 하는 일을 물어봤다.

"혈액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주 급한 상황이 많아요. 혈액을 공급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저희 한마음혈액원은 적십자사와는 다르게 혈액을 필요로 하는 모든 병원에 밤이나 낮이나 요청만 하시면 언제든지 병원으로 직접 가져다 드리는 체제를 갖추고 있어요."

그녀는 혈액사업을 하면서 헌혈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은 헌혈을 하고, 헌혈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혈액사업 발전을 위해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헌혈을 30번 했다.

그녀는 한마음 혈액원에 이어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KOST)'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인체조직기증을 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치료를 위해서 필요한 대부분의 인체조직이식제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단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체조직이식제란 무엇이고 인체조직기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리는 일을 한다. 덧붙여 그녀는 장기기증의 문제점에 대해 짚어주었다.

"우리나라 기증문화가 기증자 중심이 아니라 사용자 중심이라는 거죠. 주는 사람 입장에서의 배려가 있어야지, 나도 필요할 때, 너도 필요할 때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거지 한쪽의 희생만으로 일방적으로 자리 잡을 수는 없다는 거죠. 기증자분들이 안전하고, 안락하고 만족해야 이 제도가 정착이 돼서 기증활성화가 되는 거에요. 마치 <아름다운 가게>처럼 각 지역에 하나의 혈액원이 생기고 그 혈액원을 통해서 생명을 나누는 통합적인 공간을 갖는 게 제 꿈이에요."

그녀는 혈액사업에 있어서의 꿈에 관해 짧게 말했다. 이어서 혈액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혈액을 많이 뽑는 것이 아니라 평소 건강하게 살아서 헌혈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거, 수술 받는 일이 없어서 헌혈할 일이 없어지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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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수원디지털시티 헌혈행사 ⓒ 한마음혈액원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지

헌혈은 '나눔의 시작'이라고 말한 그녀는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10년을 일했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함께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작은 일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중요한 건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누군가가 해야 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바로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분명히 역할분담이 있는데 한 곳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그것을 뒷바라지하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문제예요. 의료도 마찬가죠. 환자를 수술해주는 의사도 중요하지만, 헌혈자, 간호사, 혈액 운반하는 운전기사, 안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또 의사나 간호사는 단지 그 분야 공부를 한 것 뿐이지, 지식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다양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전문직에 대한 다양성에 대해 인정을 안해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원래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변화와 가치있는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삶, 생각, 직업에 있어서의 다양성, 그런 것들을 인정해야지 다른 사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양하게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지 모두 균형적으로 발전하고 선진화가 되겠죠."

삶은 자신이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다. 김명희씨는, 인생을 살면서 결정적인 변화를 준 사건은 남편이 개업을 해서 망한 일이라고 했다. 만약, 실패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했을 거라며. 의사로서의 삶이 아니어도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 그녀에게서 당당한 자신감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주관이 뚜렷하고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명희는?

1960   서울 출생
1991   세브란스병원 마취과 수료
1991   대한적십자사 혈액원 의무연구실장
2000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의료감독
2002   (재)천주교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명운동
        부장
2007   이화여자대학교 법과대학 생명윤리정책
        연구소 연구교수
2009   한마음혈액원 혈액안전국장 ~ 현재

<단체>
한마음혈액원 http://www.bloodnet.or.kr/

못다한 이야기

1. 좌우명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직하지 않는 지식은 가치 없는 지식이라고 생각해요."

2. 나의 멘토는 누구?
"종교적이지만 인간적인 예수님."

3. 20년 후의 나의 모습은?
"텃밭을 가꾸고 싶어요."

4. 삶이 힘들고 지칠 때는?
"기도하죠.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5. 혈액원을 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았을 때는?
"2001년에 조혈모세포기증 서약을 했는데 작년 가을에서야 전화가 왔어요. 너무 반갑고 신기했고, 로또가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27세인 여자환자인데 저랑 유전자가 맞아서 올해 1월에 기증을 하게 됐죠."

6. 자신에게 행복이란?
"한마음혈액원을 내가 프로포즈를 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우연히 길을 가다가, 한마음혈액원 로고가 달린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목이 메어지는 것 같아요. 행복해요. 아무도 나한테 칭찬을 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지나가는 것만 봐도 스스로가 대견하죠.

7.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이 일을 또 해서 더 잘하고 싶어요."
#한마음혈액원 #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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